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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가을갈이 끝낸 논으로 철새가 날아든다. 논 가운데 집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엊그제 내린 비에 흙무더기가 축축하니 부풀어 올랐다. 초겨울 일찌감치 가을갈이를 끝냈나 보다. 벼를 베어낸 뒤 모진 땅 그대로였으면 가뜩이나 썰렁했을 텐데 깊이깊이 갈아서 한결 부드럽다.

가을갈이, 가을갈이 이름까지 예쁘다. 땅심을 높이고 작물의 뿌리가 잘 뻗게 하려고 고랑고랑 갈아엎는다. 논의 상태에 따라서 깊이갈이와 얕게 갈이가 있고 시기에 따라 가을갈이와 봄갈이로 나누어진다. 가을갈이는 미숙논과 볏짚이나 퇴비를 사용한 논에 필요하고 봄갈이는 염해논, 모래논일 때 적정하다. 특별히 봄갈이는 모내기에 맞춰서 하게 된다. 반면 가을갈이는 추수가 끝나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은데 어떤 경우든 토질이 부드러워지고 벼가 잘 자라게 된다.

처음 애벌갈이는 깊게 하는 것이 좋다. 깊게 하면 땅이 잘 삶아진다. 재차 갈아주는 것은 얕게 가는데, 먼저 큰 쟁기로 땅을 갈아엎은 다음 꼼꼼하게 갈아 준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갈아주면 훨씬 효과적이라고 하니 중요성이 새삼 느껴진다.

가을갈이 끝낸 농부의 심기를 헤아려 본다. 그즈음이면 추수를 끝내고 한시름 놓을 때다. 일에 지치고 힘들어서 손을 놓고 싶었을 텐데 얼마 후 또 저렇게 갈아엎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가을걷이 끝난 논에서 연달아 가을갈이는 미루고 싶었겠지만 결단을 내렸을 테지. 힘들기는 하지만 바쁜 봄철에 여가도 생기고 뿌리심이 강해지면서 풍작이 될 거라고 했으리. 우리 대부분 봄에 갈아엎는 춘경에 익숙하지만, 가끔 봄갈이보다 가을갈이가 더 적당한 모래논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도 살면서 인생의 밭을 갈아엎는다. 갈아엎는 것도 갈아엎는 거지만 경우에 따라 가을갈이도 감행할 수 있어야겠다. 봄은 따스하기나 하지 추수가 끝난 가을에는 썰렁하고 을씨년스럽고 내키지 않지만 그럴 때 과감히 해치울 수 있으면 여러모로 유익하다.

특별히 가을갈이 같은 경우 흙이 떠 있는 상태로 겨울을 나면 얼지는 않기 때문에 이듬해 봄비에도 부드럽게 풀린다. 인생의 밭 또한 운명과 시련 속에서 윤택해진다. 자기만의 생각이나 이념을 갈아엎을 경우 가을갈이 때 지저분한 부스러기와 찌꺼기가 땅속에 묻히듯 언짢은 기억도 묻히면서 튼실하게 자라는 여건이 된다. 봄갈이든 가을갈이든 부풀어 오른 흙덩이가 비를 맞으면서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특이한 것은 호리갈이와 겨리갈이다.'호리갈이'는 쟁기 하나에 소 1마리를, 겨리갈이는 2마리에 연결한 방식으로 산다랑치 논이 많은 강원도에서 흔했다. 척박한 논일수록 겨리갈이가 적정하다는 뜻일까. 시기에 따라 봄갈이 가을갈이가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밭 또한 겨리갈이를 해서라도 부드럽게 만들 수 있어야겠다.

가을갈이 끝낸 논이 다시금 고즈넉하다. 해거름, 서리 까마귀 우짖을 때 보면 을씨년스럽지만, 늦가을 자체도 그 이미지였다. 얼기설기 뒤집어진 흙덩이 위로 서설이 날리고 함박눈에 덮이면 꽝꽝 얼지는 않아서 이듬해 농사는 훨씬 수월하단다.

내 인생 가을갈이도 삶의 목록에 추가해야겠다. 뒤집어진 후에도 겨우내 폭설에 눈보라에 시달리겠지만 그럴 때마다 더 깊이 뿌리박을 걸 생각해야겠다. 봄갈이든 가을갈이든 농사에는 필수적이고 그로써 풍작을 기대할 수 있다니 허투루 볼 게 아니지 싶다. 인생 또한 갈아엎을 때마다 살풍경하겠지만 그런 속에서 뭔가 달성된다면 과정이고 소망이었으니까.

지금까지 봄갈이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가을갈이에 치중해야 할 게다. 봄갈이가 끝나면 꽃피고 새우는 풍경이 추가되면서 그나마 푸근했지만, 가을갈이 끝난 뒤 썰렁한 날씨도 가끔은 이색적이다. 가을갈이 끝낸 황량한 모습이야말로 봄을 새기고 초록을 꿈꾸는 메아리처럼 빈 들에 울려 퍼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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