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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이웃집 아낙이 텃밭에서 깻잎을 따고 있다. 창호지마냥 얇은 잎을 하나하나 포개놓는다. 주인집 아저씨는 뒤꼍에서 땅콩을 캐는 중이다. 눈을 들면 온통 황금벌판에, 물들기 시작하는 산자락이 그림처럼 곱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들에 하늬바람까지 상쾌하다.

어릴 때 같으면 곳곳에 허수아비가 가을을 지키고 있었다. 명색은 참새를 쫓는 것이었으나 풍경에만 팔리지 않았을까. 직무유기라고 책망할 수도 없다. 봄 여름에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농군도 가을이면 신선처럼 한가로웠다.

날씨까지 맑고 신선하다. 하늘이 높고 바람까지 시원해서 어르신들 팔 다리 저린 것도 가라앉는다.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 밑에서 글 읽기 좋은 계절이다. 어느 하룬들 소홀히 할까마는 여름에는 나방이며 하루살이 등 온갖 벌레가 덤빌 테니 글공부에 적당치 않다.

달 밝은 가을밤에는 훨씬 더 일취월장했으리. 독서의 계절로 회자된 것도 이해가 간다. 후텁지근한 여름과는 달리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 추야장장 기나긴 밤에 글을 읽으면서 등화가친이라는 예쁜 말도 나왔을 것이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으로 다시 피는 두 번째 봄이다. 독서로 얻은 지식을 가다듬는가 하면 낙엽을 모으듯이 추억도 모을 수 있다. 곱게 곱게 물드는 세상이 유화처럼 보일 때, 우리는 가을에 와 있음을 안다. 가을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었거늘. 불현 듯 기도하고 싶고 가을나무에서 나부끼는 모든 잎들이 행복을 일깨워 주는 걸 보면.

때로는 낙엽 한 장에서도 가을이 묻어난다. 떨어지는 잎 한 장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헤아린다. 냄비 속의 생선이 익었는지는 한 마리만 먹어 봐도 되는 것처럼, 가을이면 그래 우리 모두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는지도 모르겠다.

추상적인 느낌이었으나 김장철 즈음의 속담은 현실적이다. '가을 무 꽁지가 길면 그 해 겨울은 춥다'라던가 까치가 집을 올려 지을 때는 추울 거란다. 무는 추위를 대비해서 꽁지를 잔뜩 늘이고 까치는 높바람 때문에 최대한 낮춰 짓는다. 추운 겨울일수록 꽁냥꽁냥 자기만의 궁리가 많다.

겨우살이 준비에 바쁜 어머니의 사연도 그 때부터 시작이다. 김장 때면 가을 무 꽁지를 유심히 살피셨다. 꽁지가 길면 보나마나 춥겠다면서 갈무리에 꼼꼼하다. 동구 밖 느티나무의 까치집도 어머니의 관심사였다.

야트막하다 싶으면 올해는 훨씬 더 추울 거라며 신경을 곤두세운다. 덕분에 추운 날에도 화롯불 끼고 앉아 밤을 구워 먹으며 오롯이 겨울을 보냈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부터 입동 전까지 흔히 보는 풍경화이다.

새삼스럽게 가을이다. 구름은 새털처럼 가볍고 냇물은 이슬을 깎아놓은 듯 수려하다. 북쪽하늘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도 만추의 서정이다. 나 역시 물을 내리면서 겨울을 준비하는 단풍처럼 가진 것 모두를 내려놓으면서 인생의 단풍을 준비한다. 그 또한 나무의 겨우살이였거늘.

물을 내리지 않으면 물기가 흥건한 채 얼어붙는다. 하지만 단풍으로 끄덕끄덕하게 마르면 이듬해 무사히 싹을 틔운다. 그 방편으로 물을 내리고 부수적으로 만산홍엽의 절경을 뽐낸다. 단풍이 고운 것은 그 빛깔이 아니라 상황에 맞춰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빛깔은 빛깔대로 예쁘고 무사히 겨울도 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생 노트에 적어두었다. 무성했던 초록이 노을빛으로 물드는 가을 산자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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