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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01.23 15:22:00
  • 최종수정2022.01.23 15:22:00

이정희

수필가

질경이 나물을 무쳤다. 오래 전 대관령에서 도려 온 것을 말려두었다. 지난해 한 번 해먹고 남은 것을 푹 삶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들기름에 볶은 뒤 양념을 넣고 버무리면 뒷맛이 향긋하다. 딱히 대관령이 아니어도 질경이보다 흔한 나물은 없다. 아득히 푸른 하늘과 수평선만 가물가물한 숲속이라서 그리 맛있게 자란 듯 감회가 새롭다.

창밖을 보니 골짜기마다 폭폭 늘어선 원시림이 천년 세월을 뽐내는 듯 장관이다. 아흔 아홉 고개는 아니어도 골짜기를 돌아갈 때마다 순간순간 아찔했다. 얼마 후 버스는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 873m라고 새겨진 돌비석 앞에서는 푸른 산의 요정이라도 된 것처럼 풋풋했다. 이렇게 높은 고개였던가. 지나온 길이 꿈결처럼 아득히 다가왔다.

구불구불 산줄기마다 마을이 들어서 있고 조개껍질만치 작은 집과 주변을 휘도는 냇물이 두 뼘에 들어올 듯 아련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골짜기가 일시에 물결친다. 바위 중턱과 나무기둥에 걸린 흰 구름은 천연 물보라다. 나 같은 사람도 시심이 떠오르는 정경에 잠깐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잠시 전 지나온 고개가 탯줄마냥 얽혔다. 버스로도 20분은 올라왔으니 20리는 족히 될 거다. 천야만야 낭떠러지를 돌아갈 때는 현기증까지 일어났으나, 새삼스럽게 험하다고 하는 삶의 고갯길을 보았다. 빗자루 하나 들고 내려가면 구름 한 삼태기는 너끈히 담을 것 같다. 오르기 힘든 산일수록 풍경은 예쁘다. 고개를 넘어올 동안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고 거북했지만, 씻은 듯 가라앉는 것도 푸른 숲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길이 생겨난 과정도 스쳐간다. 처음에는 노루와 토끼가 뛰어다녔겠지. 그러다가 나무꾼이 낫으로 혹은 지게작대기로 그루터기를 쳐내면서, 장돌뱅이 길이 되고 지금에 이르렀으리. 당초에는 사람 하나 빠져나갈 정도로 좁았던 길이다. 사는 것 또한 길을 만들면서 가는 과정이지 싶었던 거다.

우리 삶의 길은 늘 좁지만, 무성한 숲을 헤쳐 가는 나무꾼처럼 상황에 따라 적당한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조성된 길도 있지만 살다 보면 대부분 처음 가는 길이다. 새로운 길을 만들고 때로는 치워가면서 자기만의 길을 가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면 어렵지 않게 답파할 수 있다.

저 밑에서 아옹다옹 하고 있을 사람들도 그려진다. 높이 보고 멀리 보면 세상은 티끌이다. 눈만 들면 푸른 하늘과 숲속인데 발등의 불만 끄기에 급급하다. 뒷산에 올라가면 동네만 보일 테고 좀 더 높이 오르면 한 고을이 그리고 좀 더 올라가면 한 나라가 보이듯 삶의 격이 높아질수록 밑바탕은 넓어진다. 나 역시 떠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하찮게만 보이니 잠깐이나마 숲속에 머물렀던 탓이리.

하필이면 그 때 질경이를 뜯었다. 취나물도 있고 고사리도 있었으나, 골짜기를 내려가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타 나물과는 달리 삶아도 줄지 않는다. 그렇게 질긴 것과는 달리 뒷맛은 연하고 부드럽다. 밟을수록 꿋꿋이 올라오기 때문에 질경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풀이 변함없이 꿋꿋한 자세와 자갈밭에서도 깔축없이 자라는 의지를 배운다.

그나마도 다녀온 지가 언제인지 아득하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일부러 가지 않는 이상에는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가끔 들러보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시간은 지체되어도 천고의 원시림에 빠져드는 것 또한 돌파구였는데 싶어 아쉬울 때가 많다.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빨리 갈 수 있는 지금도 그 길이 생각나듯, 힘겹게 살아 온 날도 가끔은 추억이 된다. 앞으로 가자니 숭산이고 뒤로 가자니 태산처럼 힘들 때야말로 돌아보면 전성기였다. 막힘없이 탁 트인 고속도로보다는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것 같던 대관령이 더 기억나듯 우리 삶에도 그런 고갯길 하나쯤은 남겨두어야 하리. 그 길이 있는 한 우리의 일상은 더 끈끈하고 풍요로워질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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