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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11.13 16:01:39
  • 최종수정2022.11.13 16:01:39

이정희

수필가

알타리 무를 다듬는 날은 하루종일 바쁘다. 떡잎을 떼고 새새틈틈 흙을 긁는 게 시간이 걸린다. 허리 한 번 펴 볼 새 없이 종종걸음을 치다 보면 산더미처럼 쌓인 무도 동이 난다. 함지에 넣고 왕소금을 뿌리고 나면 초겨울 짧은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고 금방 깜깜해진다. 부랴부랴 저녁을 먹고는 갓이며 파를 썰고 마늘을 찧는 등 양념 준비에 들어간다.

어느 새 밤도 이슥해지고,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부터 알타리 무를 씻는다. 두 번 세 번 물을 갈아서 헹군 뒤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는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알타리 무는 일정하게 다듬어야 볼품이 있다. 큰 것을 쪽을 내고 뭉툭한 것은 먹기 좋게 저며서 양념과 함께 버무린다. 이튿날이면 어머니는 딸들에게 예의 택배로 부치셨다. 딸들 사랑도 어지간했지만 그렇게 싸움 싸움 하면서도 김장을 끝냈으니 나 또한 나도 어지간히 지쳤다. 세 분 이모님이 거들어 주신다 해도 번거롭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기실은 다듬을 때부터 도와 주셨다. 대부분 총각무인 알타리를 다듬는데 가끔은 알타리와 약간 다른 초롱무와 달랑무가 등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듬기만 하면 되는데 낯선 녀석들을 보고는 초롱무라고 했다가 달랑무라고 하면서 언쟁이다. 급기야는 친정에서 코흘리개 적 서운했던 일까지 불거진다. 끝내는 삐쳐서 가버리기도 하셨다. 당연히 남은 두 이모의 뒷담화가 이어지고 참 어지간히도 싸우시더니 그게 벌써 십 년 전이다.

내가 봐도 고만고만해서 뭐가 다를까 싶었으나 보통은 알타리 또는 총각무였다. 총각무를 일명 알타리라고 하는 것인데 데면데면하니 뭉툭하게 생겼다. 좀 더 세분화해서 초롱무는 작은 단지처럼 둥글고 달랑무는 달랑달랑 소리가 날 것처럼 앙증맞고 예쁘다. 털까지 숭숭한 총각무에 비해 이들은 날씬한 생김에 매끈한 피부를 가졌다. 하나가 남성적이라면 다른 하나는 훨씬 여성적이다.

조금씩 담글 때는 한꺼번에 사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지만 분량이 많아지면 그렇게 뒤섞인다. 처음에 사들인 무도 있고 추후로 가져 온 무까지 포함해서 초롱무인지 달랑무인지 헷갈리지만 함께 버무리면서 명색은 그냥 총각무김치가 된다. 어지간하면 한 무리에 끼워주는 것도 삶의 미덕이었으리. 시시콜콜 들먹이다 보면 탁상공론은 끝이 없다. 어지간 사이트의 행복 또한 특별한 것 없이 비슷비슷하지만 소망이 있으면 살만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지간이라고 하는 말의 이미지부터가 그랬다. 옛날 고려 왕족들은 겨드랑이에 비늘이 돋쳐 있었다. 그 중 어떤 왕이 하루는, 자기들처럼 비늘이 있는 지씨 성 관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확인해 본즉 송나라에서 이주해 온 '지경'의 6대손인 '지증익'이었다. 그러나 정작 왕씨 성을 내릴 수는 없고 고심 끝에 어魚가로 행세할 것을 명했다. 그렇게 어증익으로 바뀌면서 충주 어씨의 시조가 된 셈이다.

이후 충주 지씨와 충주 어씨는 혼인도 하지 않았다. 겨드랑이의 비늘 때문에 지씨에서 어씨로 갈라졌을 뿐 같은 형제에 일가친척이었기 때문이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는 실망 끝에 내뱉는 말이지만 '너는 성격이 어지간하니까 잘 참을 것이다'라고 하면 무던한 느낌이다. 다듬을 때는 온종일 시끌시끌 접시가 열 번은 들썩이지만 심성이 어지간한 시이모님 한 분이 남아서 끝까지 도와주시던 것처럼 말이다.

11월도 어지간한 절기다. 겨우살이에 바쁘기는 해도, 동지가 되면 팥죽을 쑤어먹고 서설이 흩날릴 때는 어린아이들처럼 설레고 좋은 시점이다. 끝물로 피는 구절초와 산국이 가을 끝자락에 흐드러지는가 하면 은물결처럼 출렁대는 억새 또한 예쁘다. 다 거둔 끝이라 풍성하지는 않아도 불수록 흐벅지다. 과유불급 강조보다는 어지간의 그, 부족한 중에도 나름 만족하는 자세야말로 경건한 섭리를 표방했으니까. 인생 좌표에 그려넣는 항목은 많지만 어지간 하나만 추가해도 수월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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