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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창밖으로 봄빛이 푸르다. 모처럼 동무들과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 광어회를 먹으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반했다. 생선회 중에 으뜸이라더니 이름값은 제대로 치렀다.

씹을수록 쫄깃한 맛에 비린내가 전혀 없다. 광어(廣魚) 또는 넙치라고도 부르는데, 푹 고아 낸 국물에 미역을 넣고 끓여도 맛있다. 초벌 요기 끝낸 선배의 말이다. 높이는 상관치 않고 오로지 깊은 바닥에서 헤엄쳐 온 결과이다. 바다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별나게 납작한 생선으로 자랐다.

얕은 데 사는 고등어 정어리도 영양식이기는 하나 깊은 맛은 따로 있었다. 소망의 진원지 또한 바닥일 게다. 높은 꿈일수록 망상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야 하리. 넘어지기라도 하면 흙투성이 공간이지만 바닥이 없으면 높은 산도 두 팔 벌려 자랄 수 없다. 나무도 푸른 하늘 일구기 어렵다. 그 가지는 뿌리를 통해서 바닥에 의지했다.

꽃씨든 풀씨든 싹을 틔우면 그때부터 뿌리가 나고 눈앞의 공간도 푸르러진다. 바닥에 머리 두는 광어의 꿈도 높이 떠오르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간절한 소망 역시 억장이 무너지듯 절망스러울 때 일이었다. 고기잡이 어부를 피할 수 있는 최적지는 훨씬 깊이 들어간 진흙탕뿐이라고 믿는 물고기 광어처럼.

내 삶의 저변도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에 힘들었다. 고난이 크면 영광도 빛날 거라던 그 메시지. 흐르는 냇물도 돌을 치우면 노래를 잃어버린다. 소망의 깃발은 고난의 성벽에서 휘날린다. 큰 나무일수록 바람이 센 것처럼 우리 행복의 일기장 역시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서의 고난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다. 높아지기 위한 또 다른 방편이었던 것을.

늦가을 낙엽도 바닥에서 뒹굴었다. 바람에 지면서 이제야 홀가분하다는 얘기도 그때쯤이다. 떨어지기 싫다고 망설였으면 이듬해 초록과 녹색정원은 바랄 수 없다. 진정한 소망은 바닥을 감수할 때 이루어진다. 간절한 소망은 믿음으로 자란다. 믿음이 가치로 형성되고 그 가치가 운명으로 바뀌는 것 또한 바닥에서도 아주 바닥일 때다.

혹 바닥에서 힘들지언정 여차할 때 대피 장소로도 안성맞춤이다. 바람 부는 제주도 올레길과 너와집은 물론 지진이 흔한 지역의 건물도 조개껍질처럼 납작하다. 어줍지 않은 높이가 추락을 동반한다면 바닥은 안전을 도모한다. 하늘을 찌를 듯 태산도 한 삼태기 흙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태산 측량이 가능한 것도 높이를 꿈꾸는 바닥의 힘이었거늘.

그나마도 평평하지는 않다. 바닷가에 가면 움푹 파인 곳에 빗물까지 고인다. 양동이도 차지 않을 흙탕물에 하늘 구름 산새가 잠긴다. 저 속에도 풍경이 잠기는구나. 그래도 산 높이를 매기는데 들쭉날쭉해서는 곤란하다. 해수면 기준으로 해발고도 몇m라고 표현하는 거다.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였지만 산 자체로 따지면 태평양 바다의 마우나케아 화산이다. 육안으로 4천107m는 해저에서 뻗어나간 1만100m 높이의 일부였던 것.

광어의 서식지가 그 정도 깊이는 아닐지라도 상상은 극대화된다. 지긋지긋한 수압에도 그런 속에서 쫄깃한 인생관이 나온다. 꽃피고 새우는 봄도 춘설과 꽃샘에 동티날까 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볕은 따스해도 아직은 춥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바람막이가 생각날 정도로 추운 날씨지만 얼마 후에는 눈을 치뜨고 들판도 푸르러진다. 우리 삶의 보호막도 행복과 기쁨이 아닌 밑바닥에서의 파도타기였다. 가장 깊은 절망이 가장 높은 소망을 새긴다는 것을 숙지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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