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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소나기가 그었다. 뒤미처 햇살이 들더니 뒤란 양지바른 김치광에서 갓 목욕을 끝내고 해바라기 중인 누름돌. 빗물이 쓸고 간 몸태는 맥이 뛰는 듯하고 뒤란은 때 아닌 활기로 넘친다. 저만치 세월 밖에 나앉아, 언짢은 것도 묵묵히 삭이며 거슬리는 얘기 들어도 잠자코 묵언 수행 중인 군상들.

이목구비가 없으니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해 보이는데 둥글둥글하니 정겹다.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걸 보면 별다른 승강이 없이 구순하게 지낼 것도 같다. 어쩌다 모난 게 있어도 타박하지 않고 봐 주지 않을까. 저리 되도록 숱한 세월 둥글려 왔는데 뭐가 더 부족하랴 싶고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 필연 어느 산골짜기에서 떠내려 와 저리 바뀌었으련만 지금 또한 바람모지 뒤꼍에서 자신을 둥글리고 있다.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시달리던 아득히 그 때처럼.

어릴 적 마을 앞의 달래강변에도 그런 돌은 흔했다. 장마 때면 수많은 돌이 떠내려 오는데 들판이라 그런지 모난 돌보다는 둥글넓적한 돌이 많았다. 어떤 것은 그릇 모양이고 천연 나룻배 모양에 생김도 천태만상이다. 검은색 회색 등 빛깔도 가지각색이고 구멍 뚫린 것도 많은데 그 중 적당한 것을 고르는 셈이다. 어릴 때라 그런 게 누름돌로 적당하다는 것은 몰랐지만 처음부터 모난 돌은 아니었고 단지 윗마을에 있던 들쭉날쭉 모가 나 있던 돌이 바뀐 것이다. 윗마을이라야 강으로 치면 한 줄기지만, 거기 강변에는 바위로 보기에는 작고 돌이라 부르기에는 크고 험하게 생긴 녀석들이 많았는데 비가 올 때마다 급류에 깎이면서 닳고 닳은 돌로 바뀌었다.

강변에 널려 있던 그 돌은 1차 과정을 통과한 것들이다. 운동장만한 강변에는 크고 작은 돌이 지천으로 널렸었다. 장마철에는 거의 그 지점까지 물이 차오르지만 나머지는 드러나는데, 바로 그 때 바람에 시달린다. 상류에서 중류에 접어들 동안 바람도 그냥 바람이 아닌 태풍에 부대껴 왔을 테고 무척이나 반들반들한데 거센 바람일수록 매끈해진다. 한낱 돌이라도 누름돌이 되려면 골짜기 상류의 모난 돌에서 다듬어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따금 뒤란에서 그들이 주고받을 고향 이야기가 떠오른다, 물결에 휩쓸리는 것도 모자라 바람에까지 단련되는 돌막들. 상류에서는 제법 큼지막했던 게 물결에 떠내려 오는 동안 닳고 닳아서 조약돌로 바뀌는 것 또한 감동적이다. 바람이라 해도 나무와 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돌막까지다. 물에 잠겨 있을 때는 물살에 시달리고 빠질 때는 바람에 시달린다.

누름돌은 그렇게 처음 가져올 때보다 매끈해졌다. 더구나 자리 잡은 곳이 또 우연히도 물받이 홈통이다. 장마에는 지붕의 흙탕물에 씻기고 겨울에는 눈 녹은 물에 씻겼다. 그렇게 점점 둥글어지는 것을 보니 살면서 단련되는 인격의 정수가 새삼 떠올랐다.

상류의 돌은 모가 나 있어도 내려갈수록 둥글어질 걸 알기 때문에 걱정 없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다. 바위가 둥글어질 정도면 얼마나 모진 바람이고 세찬 물결인지 알 수 있다. 겉으로 시달리는 것보다 닳고 닳으면서 받는 갈등이 더 많았을 텐데 하류에 접어들고 매끈해질 때마다 나름 뿌듯했겠다. 상류에서는 거칠고 모난 돌도 끝내는 매끈한 돌로 바뀔 테니 그 또한 버릴 수 없는 소망이었으니까.

내 삶의 비탈에 굴러 있는 누름돌을 생각해 본다. 돌은 하류에 접어들수록 둥글어지건만 하류에 들어선 내 삶은 아직도 모가 난 채였다. 하류의 돌이 틀림없이 둥글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인생의 하류에서 모난 돌은 품성 문제다. 더 많이 시달리고 둥글어져야겠지. 강변의 돌이 누름돌로 되어 정갈한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내 삶의 누름돌 역시 삶을 지탱해주는 보루 역할이다. 상류의 모난 돌에서 반들반들해진 조약돌이 삶의 지침이 되는 것 때문에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라고 자신을 채찍질해 본다. 누름돌의 교훈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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