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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길섶의 버드나무가 마침내 새 순을 달았다. 치렁하게 늘어진 가지는 초록색 물로 차오른 지 오래다. 기실은 벌써부터 물이 올라 있었는데 제가 먼저 틔우면 자잘한 풀은 시득시득 말라버린다고 기다려 왔다. 실제 나무 밑에는 망초대와 질경이와 돌단풍 등이 무성하게 자라는 중이었다. 이제는 그늘이 져도 웬만치 뿌리박은 뒤라 타격은 없을 거라고 마음껏 잎을 늘리고 할 테니 볼수록 어기차다.

겨우내 봄을 기다렸을 것이다. 벌써부터 봄물을 긷는다고 펌프질을 해 왔을 텐데 바닥을 기는 풀 등이 못 미더워 기다렸다. 한갓 나무에게 그리 깊은 속내가 있다니. 하기야 새싹도 낮은 데서부터 돋아나기는 했다. 이른 봄 고샅고샅 지나다 보면 냉이와 씀바귀 달래가 삐죽삐죽 나와 있었지. 새콤달콤 무쳐먹고 나면 4월도 후딱 가버리고 이어서 앉은뱅이 민들레가 크고 작은 단추를 여미기 시작하면 등성이 떨기나무는 그제야 비로소 잎이 나왔다. 버드나무의 경우처럼 자잘한 풀을 위해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런 이치로 애당초 낮은 데서 먼저 싹을 틔우게 된다.

봄 들판도 항차 그렇게 질서를 고집하는데 우리는 가끔 나무와 같은 강한 사람들이 먼저 틔우려고 실랑이를 벌인다. 나무야 덩지도 있고 연륜도 많아서 언제든 틔울 수 있어도 기다리는 건 쉽지 않으련만 우리는 양보는커녕 먼저 틔운답시고 서두르다가 어린 싹을 짓밟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한 두 해도 아니고 봄이 될 때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또한 놀랍다. 나무는 자연의 아들이라더니 그래서 틀스럽고 어엿한가 싶을 정도다.

어릴 때도 참 더디게 자라지만 그래야 재목감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잎을 늘리고 그늘을 키우다 보니 이제는 자기보다 어린 풀이 싹을 틔우도록 양보하는 어기찬 나무가 되었다. 마디게 자라면서 조급해하지 않는 미덕을 배우기도 했지만 이를테면 기다릴 줄 아는 품성이었던 걸까.

올해도 예의 따스해지면서 버드나무는 먼저 틔우라고 권유했겠지. 자그마한 풀들은 그게 늘 고맙기도 하고 염치가 없어 사양한 적도 있겠지만 나무로서는 자기가 양보하지 않으면 그냥 말라 버릴 테니 강권이라도 해야 될 판이다. 한편에서는 사양하고 한편에서는 안 된다며 이룬 봄 언덕 교향곡. 이익을 다투는 승강이가 아니라 서로 양보할 동안의 옥신각신이었다. 뒤죽박죽 피어도 아름다운 봄꽃들처럼. 모듬모듬 겹쳐 피면서 다툼 아닌 다툼으로 부풀려지는 것도 소담한 느낌이었으니까.

나 역시 그렇게 기다려 준 적이 있었나 싶을 때가 많다. 기다리기는커녕 손해라도 볼 듯 조바심을 치곤 했다. 실제 손해가 없지도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릴 수 있는 품성이 아쉽다. 양보든 혹은 배려일 수도 있지만 질서라 해도 가장 원초적인 자연의 질서라면 약한 누군가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품성과 지혜가 아쉽다. 내가 더 우월하기 때문에 앞장설 것을 고집한다면 나 역시 훨씬 강한 누군가에게 밀리고 만다. 나무가 먼저 싹을 틔울 경우 그 밑에 자생하는 풀은 끝내 시들고 마는 것처럼.

눈 감으면 문득 버드나무 가지에 떨잠마냥 부서지는 햇살. 이제 곧 어우러질 신록도 자못 설렌다. 파릇파릇 새 순보다 아름다운 것은 기실 저보다 어린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고 그게 곧 질서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도 특히나 그 질서 때문이라면 참으로 경건한 섭리다. 누군가 혹 더디 피는 듯 보일 때는 남을 위해 한 걸음 양보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봄에는 꽃도 예쁘지만 한 그루 나무의 미덕 때문에 훨씬 더 곱고 찬란한 계절이 되었다. 나도 잠깐 그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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