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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바람 부는 언덕에 질경이가 돋았습니다. 뚝방을 돌다가 그걸 보는 마음이 쌀쌀한 중에도 신선했습니다. 겨울이면 가끔 보는 건데 그 때는 초록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죠. 외딴 집 텃밭을 돌아가니 이번에는 냉이가 쭉 깔려 있지 않겠습니까. 질경이를 본 다음이기도 했지만 첫눈을 무릅쓰고 돋아난 게 어쩐지 싸한 느낌이었습니다. 초록에도 이삭이 있구나 싶은 마음과 함께, 이십 칠 년 전 큰 애의 백일잔치 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8월 7일생이었으니 백일은 정확하게 11월 14일이었지요.

하루는 어머니가 과수원에 가서 쑥을 뜯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백일을 사나흘 앞두고 음식 준비에 한창 바쁠 때였습니다. 수수팥떡에 쑥 절편을 곁들인다고 했으나 탐탁치는 않았습니다. 된서리가 내린 끝이기도 했고 지금과는 달리'80년대 초의 11월은 엄동설한이었거든요. 쑥이라니 그것도 새파란 쑥을 뜯으라니 의아할 밖에요. 눈치를 알았는지 어머니는 나무 밑에 가면 많을 거라고 했습니다. 핑계를 댈 수도 없어 옷을 든든히 입고 바구니와 창칼을 들고 나섰습니다. 봄에도 나물을 캔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얄궂기만 했습니다. 바구니를 낀 채 5리가 넘는 길을 가면서 사뭇 떨었습니다. 공교롭다고 생각했으나 어른 말씀이고 더구나 내 아들 백일잔치에 쓸 거라는데 싶어 꾹 참았습니다.

과수원에 도착한 나는 먼저 밭두둑을 살폈습니다. 나물은커녕 얼어붙은 땅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호미 날이 튀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쉬려고 하면 몸이 또 얼어붙곤 합니다. 괜한 일을 한다 싶어 짜증이 났으나, 명색이 어른인데 아무려면 허튼 분부를 할까 싶어 콩을 턴 자리며 깻단이 쌓인 곳을 헤쳐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 이름 모를 풀이 고물고물 올라 와 있지 않겠습니까. 어딘가 나물도 있을 것 같아 사과나무 밑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측한 대로 거름을 한다고 깔아 둔 지푸라기 위에 쑥과 질경이와 냉이가 소복했습니다.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냉이는 흙을 털고 쑥은 수내기를 잘라 따로 모았습니다. 나물이라 해도 봄에는 앙상했는데 그 때는 의외로 살쪄 있더군요. 이 겨울에 무슨 쑥이냐고 했던 불만도 사라졌으니 그 새 바구니가 꽉 찼던 겁니다.

어지간히 캤다 싶어 밭고랑을 돌아 나오는데 저만치 또 나물이 보였습니다. 단숨에 가서 뜯었습니다. 한 번만 캐야지 하고 담다 보면 또 눈에 띕니다. 그 바람에 자꾸만 눌러앉아 캤습니다. 집에 와 펼쳐 보니 쪽마루에 가득했습니다. 떡잎까지 새파란 게 다듬을 것도 없었지요. 덤으로 캐 온 냉이를 삶아 무치면서 봄 시절 못지않게 새파랗던 경이로움도 새겼습니다. 나물 뜯는 재미를 처음으로 알았던 거죠.

봄에 푸른 쑥은 당연하지만 늦가을 회색 들판에 올라온 이년생 풀의 소망은 어기찬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삶의 지표로 남는 것도 그 때의 어머님 나이가 되어서야 깨우칩니다. 겨울에 나물 운운할 수 있는 바탕에서 여름보다 푸른 초록의 모태를 본 것입니다.

눈 속의 질경이가 다시금 떠오릅니다. 눈보라 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겨울 삼동을 난 건 찬바람을 파고 든 초록이 겨울보다 강하다는 뜻이겠지요. 철부지 신혼 때 백일잔치를 앞두고 뜯은 나물의 기억으로 나도 제법 의지를 키웠습니다. 언 땅을 비집는 뿌리심이야말로 새 봄에 푸르러질 원천임을 생각했던 거죠. 겨울에도 푸른 나무새같이 힘들수록 꿋꿋해지는 삶도 아울러 헤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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