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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눈이 내렸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함박눈이 내리는 대로 쌓인다. 얼마 후 눈을 흠뻑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도서관 뜰의 나무들. 정원수는 정원수대로 작은 떨기나무는 또 그대로 하얀 털외투를 걸쳤다. 얼마나 예쁜지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다. 눈이 내린 다음 소복소복 쌓이는 게 무에 새삼스러울까만 이따금 보면 싱거우리만치 금방 녹아버릴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내린 눈이 그랬다. 오늘처럼 함박눈이 내리고는 푹한 날씨에 금방 녹아버렸다. 모처럼 눈이 왔다고 어린애마냥 좋아했었지. 사진을 찍어서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도 보내려고 잔뜩 별렀는데 잠깐 새 녹고 말았다. 교통 체증을 생각하면 다행이었으나, 눈이 쌓이면 우선은 가습기처럼 습도를 조절하게 된다. 그로써 건조한 날씨가 눅진해지고 호흡기 계통의 질병이 줄어든다면 하루 이틀 불편한 것쯤은 참을 수 있어야겠다.

눈 쌓인 풍경이 오래 가는 것은 당연히 추울 때다. 우리 잘 아는 히말라야니 킬리만자로니 하는 만년설 풍경도 녹을 새 없이 춥기만 한 그 지역 특징 때문이다. 행복이나 행운도 불행을 극복하면서 추구하는 과정이었던 것을.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면 따스한 날 내린 눈이 금방 녹아버리듯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이따금 녹기라도 할 경우 만년설이 그렇게 멋진 풍경일 수는 없는 것처럼. 불행은 또 추운 날씨 같아서 우리 늘 힘들지만 그게 아니면 오래 가지도 않거니와 절박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똑같이 쌓인 눈을 놓고 봤을 때 역시 추우면 추울수록 백설의 풍경이 오래 간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추울 때는 힘들지만 겨울이 춥지 않으면 이듬해 병충해가 많아진다. 딱히 그게 아니어도 궂은 날씨에 단련될 동안 어려움을 이겨나갈 힘이 생기지 않을까. 여름내 계속되는 무더위 또한 만만치 않으나 어렵사리 극복하다 보면 한겨울 추위도 견딜만해진다. 지나치게 무더운 여름도 그로써 나름 내성이 생기는 폭인데 바로 그 겨울의 냉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없이 생략된다면 균형이 깨지는 등의 무리가 따를 수 있다.

다시금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 똑같이 쌓인 눈인데 여느 때 금방 녹아버린 것과는 달리 온종일 그냥 남아 있는 게 무슨 섭리처럼 엄숙해 온다. 춥지 않고 따스한 날씨에 금방 녹기도 하는 것에 비하면 특별한 풍경이듯 그렇게 세상을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춥기는 해도 풍경은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새기는 것이다, 힘들고 괴로워도 모처럼의 행운이나 소망을 오래 가도록 하기 위한 바탕화면이었다.

아무려나 눈 쌓인 도서관에서의 하루가 유달리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모처럼 쌓인 눈을 완상하던 그 행복이 천금보다 소중했다. 이따금 가서 글을 다듬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는 해도 오늘 그 하얀 솜이불처럼 혹은 수많은 눈꽃송이 만발한 것 같은 풍경 때문에 더 푹 빠지는 느낌은 흔치 않았다. 춥기는 하지만 그로써 내리는 대로 쌓인 정경도 내 삶의 바탕화면에 눈처럼 아름답게 표백될 테니까. 저녁에는 또 예의 추워질 것이나 하루 종일 완상했던 백설의 비경을 돌아보면 충분히 견딜만하다고 본 것이다.

해거름이 되자 윙윙 몰아치는 칼바람. 청미천 기슭을 돌아가니 눈이 그 새 꽝꽝 얼어붙었다. 함박눈이면서도 얼른 녹지 않는 게 이번 추위는 제법 오래 갈 듯하다. 그 간 푹했던 것을 생각하면 짱짱해질 추위가 두렵기도 하고 기온이 떨어지고 난 뒤의 교통 혼잡도 적지 않은 문제였으나 그게 아니면 12월이 다 가도록 눈 풍경 하나 없이 삭막했을 것이다. 하얗게 쌓인 백설의 원시림은 모처럼의 추위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었다.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듯 나쁘다고 해서 모두가 나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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