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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포도 하면 남국의 태양이 떠오른다. 둑에서 바라보니 까맣게 잘 익은 포도송이. 타오름 달 8월 땡볕은 눈이 부시고 그 위로 수 백 송이 열매가 터질 듯 빛난다. 불현듯 포도나무 가지에 묻어나는 알싸한 기억 한 자락. 포도가 익을 즈음이면 시원한 그늘에서 책을 보다가 닿는 대로 따 먹는 게 일이었다. 눈 감으면 입안에 고이던 향취가 금방이라도 잡힐듯하던 그 느낌.

더불어 생각나는 우화 한 컷.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이 멀리 포도나무를 보고는 재빨리 들어가 숨었다. 사냥꾼은 하릴없이 돌아갔고 사슴은 포도나무 순을 잘라 먹었다. 곧 이어 간단없이 흔들리는 덩굴. 터벅터벅 돌아가던 사냥꾼이 그걸 보고는 급히 활을 쏘았다. 그러자 사슴은"내가 잘못이었어. 포도나무 덕분에 살아났거늘 배은망덕하게도 순을 잘라먹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죽었다는 이야기.

사냥꾼으로서는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나무랄 수 있지만 그래서 다 놓친 사슴을 잡을 수 있었다. 단지 은혜를 모르는 녀석 이전에 스스로의 처신 문제라는 생각. 숨어 있는 동안도 무척 불안했을 텐데 감히 순을 따 먹다가 들켜 버렸으니 아무리 맛이 있고 배가 고파도 일단은 포도나무 밭을 벗어나야 했거늘 참 어리석다.

사슴은 결국 두 가지를 잊었다. 첫째는 그늘 때문에 살아난 은혜를 잊고, 다음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던 순간을 망각했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 교훈적이었으되 사슴과 포도나무 이야기는 자못 인상적이다. 그까짓 순 좀 잘라먹었기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 생각할수록 분했겠지만 우리도 어찌 어찌 급한 불을 껐을 경우 엉뚱한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게 다반사였다.

이솝은 왜 또 사슴의 은신처를 포도나무로 설정했을까. 혹 다른 나무라면 맛이 덜해서 연연하다가 뒤늦게 잡히지는 않았을 것 같으나 그럴수록 조심했어야 옳았다는 생각. 포도주는 특별히 달콤한 맛이고 그게 포도의 남다른 특징이었다. 그렇더라도 목숨이 달린 일이라 무모하게 따 먹지는 않았을 텐데 조마조마 숨어 있다가 긴장이 풀리면서 죽음을 자초했으니 공교롭다.

탈무드에 보면 아담이 어느 날 포도나무를 심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악마가 그걸 보고는 잘 가꿔 줄 테니 그 대신 포도주를 조금만 달라고 청했다. 아담은 쾌히 수락하고 악마는 양과 사자, 돼지, 원숭이의 피를 받아 키웠다. 그 결과 포도주를 마시면 양처럼 온순해지다가 사자처럼 사나워지고 아주 취해 필름이 끊기면 돼지처럼 아무 데서나 뒹굴고 원숭이처럼 날뛰게 된다는 속설의 배경이다.

사슴이 저 들킬 줄 모르고 먹다가 죽는 것처럼 우리 또한 맛있는 포도주라고 거푸 마시다가 온갖 허접한 행동을 일삼을 수 있다면 절제가 필요하다. 먹 자줏빛 송이가 꽈리처럼 익어가던 풍경 또한 아름다웠지. 뭐랄까 볕 쨍쨍한 남국의 이미지가 먹빛 송아리 째 달린 것 같은 느낌. 수없이 지나간 천둥 번개를 생각하면 그 하나하나가 검은 보석처럼 빛나곤 했는데….

과일 치고는 드물게 먹빛으로 익는, 어딘가 이국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순을 먹다가 변을 당한 것은 유감이지만 나 역시 머루 맛에 취해 입술이 까매지도록 먹은 기억이 있다. 탐스러운 열매를 찾아다니다 보면 금방 어두워지곤 했는데 지금은 비스름하게 생긴 포도를 보고 맛난 것일수록 절제하지 않으면 모처럼 영양식도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에 잠겨 있으니 묘하다.

올 여름은 볕이 또 유달리 좋아 집집이 포도가 참 잘 익었다. 인생 역시 머루알 포도송이처럼 익기 위해서도 곡절이 따르는 걸까. 볕도 볕이지만 태풍 속에서 더 잘 익는다니, 나도 그렇게 익어야겠지. 우거진 잎과 탐스러운 송이보다 속속 익히기 위해 지금도 땡볕 아래서 묵묵히 영글어가는 한 그루 포도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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