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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녹두에 벌레가 났다. 바글바글하니 구멍 뚫린 것은 골라내고 맷돌에 타는 중이다. 행주로 닦은 뒤 녹두를 넣고 돌리면 들들들 소리와 함께 좌르르 쏟아진다. 물에 불렸다가 몇 번 행구면 껍질은 떠내려가고 하얀 속살만 남는다. 그것을 쌀과 함께 갈아서 녹두전을 부쳐 내는 것이다.

가끔 그렇게 쓰다 보면 참 못도 생겼다. 어처구니를 받친 쇠는 빨갛게 녹이 나고 입가에는 세월이 더께로 앉았다. 울퉁불퉁 얽은 두 개의 돌은 또 여간 흉하지 않다. 예쁜 구석은 약에 쓰려도 없으나 우르릉 우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날 때는 하늘이 지나가곤 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한여름 벌레가 나면 생각난 듯 쓰는데 오롯한 기분이다.

내가 타는 녹두 역시 바람과 천둥소리 듣고 자랐다. 낟알 하나에 깃든 자연의 섭리가 새롭다. 덩치에 비해 들들들 울리기만 해서 대화도 가능하다. 올케와 시누이, 형님과 아시동서가 맞잡고 돌리면 여느 때와는 달리 친근한 모습으로 비친다. 껄끄러운 사이도 느긋해질만한 정경이었던 것.

맷돌은 암 맷돌과 숫 맷돌과 어처구니로 된 오래 전의 주방기구로 볼 수 있다. 어처구니는 흔히들 어처구니가 없다고 하는 그것으로 맷돌의 손잡이다. 다 준비해 놓고 돌리려는데 중요한 게 빠졌으니 맥이 풀릴 수밖에. 일례로 콩을 갈아서 두부를 만들 경우 물기 때문에 닦아서 말리게 된다. 어떤 연유로 금방 꽂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찾느라 부산을 떨게 되고 갑자기 어처구니가 없다면서 전래된 말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간단치 않다. 그냥 넣고 돌리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많이 들어가면 생짜로 나오고 적을 때는 부서지기 일쑤다. 돌려대는 힘도 약하면 그냥 새 나가고 적당해야 알맞게 타진다. 곡식도 서서히 돌리면서 넣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잘 되지 않았다. 멈춘 뒤에 넣고 돌릴 수도 있지만, 이어 달리기에서도 뛰면서 바톤을 넘겨주어야 다음 사람이 순발력을 발휘한다. 적절한 순간에 넣지 않으면 리듬이 깨지고 속력이 떨어진다.

믹서와 다른 점은 뭘까. 믹서는 내용물이 흔적도 없이 되지만 이것은 지그시 눌러대는 힘으로 곡식을 갈아낸다. 솔기가 타개지듯 하므로 어느 정도 형태가 남아 있다. 그에 비해 믹서는 갈아대면서 올이 풀리고 찢겨 버리고 만다. 혹여 부부의 상징으로 볼 경우 사뭇 느긋한 분위기다. 가령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때도 부드럽게 타개지는 방식이라면 복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믹서에 돌리듯 한 거라면 수월하지는 않을 듯하다.

당연한 말로, 맷돌의 윗부분 양暘은 하늘을 나타내고 아랫부분 음陰은 땅을 가리킨다. 음양은 또 밝고 어두운 명암과 길고 ㅤㅉㅏㄻ은 장단, 높고 낮은 고저를 가리킨다. 만물을 만들어 내는 상반된 성질의 두 가지 기운을 뜻하며,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은 여러 가지 측면도 더불어 가리키는 상대적 개념이다. 두 개의 돌에서 하늘과 땅을 보는 우주적 견해와, 다르기 때문에 맞물려지는 관계 또한 신비스럽다.

그 양면성은 곧 세상 이치의 근원을 나타낸다. 얼마 되지 않을 때는 혼자서도 충분하지만 작업이 방대할 때는 둘이서 하게 된다. 힘도 힘이지만 한 사람이 밖으로 돌리면 다른 한 사람은 안으로 돌리게 된다. 그럴 경우 안팎의 역할을 고루 배분할 때라야 일이 원만해진다. 둘이서 하는 일이 가끔은 어려울 수 있음도 그 때문 아닌지. 호흡이 맞지 않으면 오히려 힘들어질 수 있으니까.

두 개의 돌이 조목조목 다른 것도 그 이치였던 것일까. 아랫돌은 윗면이 불룩하고, 윗돌은 아랫돌이 오목해서 서로 맞게 되어 있다. 우리 똑같지 않다고 늘 다툼이었으나 세상은 높낮이가 있고 길고 짧은 양면성으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그냥 다른 것을 모르고 틀리다는 오산 때문에 시행착오도 적지 않다. 판에 박은 듯 똑같을 때는 균형이 깨질 수 있고 그런 식이어서는 절대로 합쳐질 수 없는 섭리를 못 생긴 맷돌에서 새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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