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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희

중원대학교 초빙교수

늦가을 볕이 허리를 낮추며 거실 안쪽까지 찾아들었다. 서늘해진 바람에 쫓기듯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품고 있던 온기를 내어놓는다. 들녘과 산기슭을 쫓아다니며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하느라고 온힘을 다 소진하였을 텐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 말간 볕 자락을 쫓아 창밖을 내다본다. 초등학교 운동장가에 가득 피었던 코스모스는 간 곳 없고 이젠 붉고 노란 단풍이 교정을 서정으로 물들이고 있다. 나무들 사이로 만국기가 펄럭이던 옛날의 가을운동회가 그려진다. 시골마을의 잔칫날, 어린학생들의 축제였지만 우리 청군이 졌을 땐 며칠 동안 속이 상해 우울했다. 나는 백군보다 하늘색 청군을 더 좋아했다. 왠지 모르게 청군이 더 빠른 것 같았고 힘도 센 것 같았다. 어쩌다 백군이 되었을 때는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청군이었을 때 지고나면 무척 억울해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을볕은 여전히 교정에 가득한데 청군을 좋아했던 소년이 어느덧 영원한 백군이 되었다.

하릴없이 서성이던 시선이 교실 옆 옹색한 주차장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빨간 승용차 한 대가 고추잠자리처럼 앉을 듯 말 듯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이윽고 제자리를 잡았는지 날개를 접고 젊은 여성운전자가 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한 번 힐끗 살피고 나서 이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지 교무실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걸어간다. 도로를 쌩쌩 달릴 때는 제 세상인 것처럼 신나지만 촘촘한 틈새를 비집고 한 몸을 끼워 넣기가 저렇게 어렵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 몸 하나 비비고 누울 자리가 없겠냐는 똥배짱이 아니고서는 두 다리 뻗고 잠자기 어려운 세상이다.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즐기는 세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피곤에 절어있다. 물론 노파심에 지나지 않겠지만 아들과 딸의 사는 모습도 늘 아등바등하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쌍둥이를 낳아 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살만하냐?" 곧바로 나온 대답은 일단 시원하다. "그럼요!" 그러고 보니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과 빤한 대답이 30여 년 전에 물려받은 그대로다.

가을볕은 땅위에 나리면서 잘게 부서진다. 바닥에 노랗게 쏟아진 은행잎들, 찰랑대는 저수지 물 위,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꽃들 위에서 부서지고 반짝인다. 그런가하면 가을볕은 텅 빈 가슴 속을 구석구석 비추기도 한다. 어둑해진 내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나무들이 화려했던 잎들을 조용히 내려놓고 스스로를 돌아보듯 나도 가을볕 앞에서 거울 속 나를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도 이맘때에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갔나 보다. 그리고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우물 속에는 달과 구름이 박힌 하늘, 그 하늘에 부는 가을바람이 있다. 그것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서 돌아서고, 돌아가다가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여워져서 도로 가 들여다보고, 미운 그 사나이를 우물에 두고 가다 생각하니 이번엔 그 사나이가 그리워진다고 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란 제목의 시다. 암담했던 시절 좁은 우물 속에 갇힌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괜찮다고 다독이는 정경이 눈물겹다. 나도 그렇게 자신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그동안 잘 살았지' 라고 생각하다가도 조금씩 고개를 드는 아쉬움으로 인해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아직도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이 남아서일까?

가을볕의 정점은 한낮이라기보다 해가 저 멀리 산 그림자 뒤로 잠겨 갈 무렵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모습은 사라지면서도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퇴장으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조금씩 느려지면서 짙푸른 '이내'가 시작된다. 이내는 낮과 밤을 이어주는 회랑이다. 낮의 기운과 밤의 기운이 장막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교차되도록 포옹의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하루의 피로와 갈등을 쓸어내고 달콤한 휴식과 새로운 여명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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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