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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11.11 13:34:50
  • 최종수정2015.11.11 13:34:56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교수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며 시선이 황급히 주위의 벽을 더듬는다. "SCRAMBLE(비상출동)"이란 빨간 표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차, 조금 전 화재경보기 점검이 있을 것이란 구내방송이 있었지, 휴~!" 벨소리만 들리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나의 신경조직은 일선비행단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비상대기 중이다.

전투기의 비상출동은 귀가 멍할 정도의 요란한 벨소리로 긴박함을 알린다. 조종사와 정비사는 전속력으로 항공기를 향해 뛴다. 진행 중이던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멈추어지고 오직 반복적으로 훈련된 절차에 따라 움직인다.

F-5전투기에 오르는 사다리에는 왼발부터 올려놓아야 좌석으로 내딛는 발이 오른쪽 발이 되고, 곧바로 오른쪽 낙하산 팔걸이에 어깨를 걸 수 있다. 그 다음 왼쪽 팔걸이에 왼손을 집어넣으면서 배터리 스위치를 올린 후 왼쪽엔진 시동버튼을 누른다. 시선은 엔진계기가 정상적인 상태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손은 바쁘게 좌석벨트를 조여 매고, 낙하산 가슴 고리를 채운다. 이어서 오른 쪽 엔진 시동을 걸고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주요 항전장비들은 엔진 시동 후에 자동적으로 작동하도록 사전에 세팅되어 있다.

잠시 후 두 대의 항공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이륙한다. 3분이 채 걸리지 않은 시간이다. 침투해오는 적기가 초당 300~400미터 이상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다고 생각하면 일분일초가 다급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 영토의 경계선인 북방한계선(NLL) 상공에 먼저 도달하고, 전투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비상출동은 전투의 시작인 것이다.

조종사에 있어서 비상대기는 가장 기본적이며 신성한 임무이다. 존재의 가치가 비상대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조종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군인의 본분은 결국 '비상대기'이다.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하여 항상 준비된 상태이어야 하는 것이 군인의 숙명이다. 개인별 직책이나 임무에 따라서 출동에 허용되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는 전투기의 비상대기는 가장 긴박하여 팽팽하게 당겨진 활의 모습이고, 화살의 자세이다.

되돌아보면 비상대기실에서의 수많은 시간을 통해 내가 군인임을 자각할 수 있었고, 내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때론 족쇄를 차고 있는 것처럼 얽매여 있는 시간이 싫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이 아닌 보다 큰 의미를 위해 살고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부대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투기는 적의 갑작스런 도발위협이 있거나 비행활동이 활발하면 '공중비상대기'를 한다. 비상대기실에서 임무지역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아예 경계선 부근에 체공하는 것이다. 이때는 연료소모를 줄이려고 높은 고도에서 전투속도가 아닌 순항속도로 유유히 비행한다.

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길어야 1시간 남짓 되는 시간이지만 전장(戰場)에서의 평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북쪽 멀리까지 내려다보였다. 한없이 평화롭게 보이는 그곳이 금단의 땅이요, 그곳 어딘가에 나를 겨냥한 미사일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영 믿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고물고물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하면 내가 마치 특별한 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우쭐해지기도 했다.

공중비상대기를 하다보면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영광을 누릴 때도 있었다. 까마득하게 먼 수평선 부근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한껏 장엄함을 자랑한 후에 해는 천천히 솟아오른다. 대지는 아직 깜깜한 어둠에 잠겨있는데 금빛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동료 항공기의 모습에서 긴장의 시름과 새벽비행의 피곤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6년 전, 전역을 하던 날은 비상대기의 소명을 마치는 날이었다. 하지만 나의 신경조직이 그렇듯 아직도 꿈속에서는 종종 비상대기 중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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