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커피의 계절이 돌아왔다. 사시사철 마시는 커피이지만 제철 과일처럼 커피 고유의 냄새와 맛이 진해지는 요즘이다. 푸석해진 머리카락과 텅 빈 가슴에 바람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멍해지는 증상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럴 땐 커피가 약이다. 따끈한 커피 한 잔에 생기가 되살아나고 꽉 막혔던 생각의 꼭지가 열린다.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내려가면 몸속 어딘가에서 커피의 달착지근한 카페인을 부른다.

사실 나는 커피마니아도 아니고 커피에 대한 지식수준도 일천한 편이다. 그런데도 오늘 아침 갑자기 커피가 그리워졌다. 언젠가 어깨너머로 본 커피 내리는 법이 생각나 직접 따라해 보기로 했다. 볶은 커피콩을 사다가 작은 절구통에 넣고 콩콩 찧어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머그잔 위에 받침대와 거름종이를 놓고 커피가루를 조심스럽게 얹은 뒤 준비해둔 뜨거운 물을 조금 따랐다. 커피가루가 물을 머금어 살짝 부풀어 오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졸졸 따랐다. 연갈색의 액체가 똑똑 떨어지면서 머그잔에 그득하게 고였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커피 향에서 고향 냄새가 느껴졌다. 초겨울 아침 부엌아궁이에서 사르르 타들어가던 갈참나뭇잎 냄새 같기도 하고, 저녁 무렵 얕은 담을 넘어 고샅길을 따라 퍼져 나가던 밥 짓는 냄새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세상의 모든 정겨운 냄새는 어릴 적 고향집과 엄마 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커피가 코를 자극한 다음 입속 혀에 감기는 순간 친구가 생각났다. 10여 년째 산행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시시한 이야기로 초등학생처럼 깔깔거리다가 얼큰한 걸음걸이가 되어 헤어지는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이 이 커피를 맛보면 뭐라고 말할까· 틀림없이 제대로 된 커피 맛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 중 한 친구는 어느 나라 무슨 종류 커피냐, 어떻게 뭘 알고 내린 것이냐고 물을 것이고, 또 한 친구는 왜 이걸 만들게 되었느냐고 의미를 따지고 들 것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바늘 같아서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서는 뜨끔하다. 그래서 친구들의 말은 정겨우면서도 삽싸레하다. 끝부분에선 살짝 띄워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먹을 만하네, 한 잔 더 줘."

늘 그런 식이어서 앞의 말들은 다 흘려버리고 마지막 말만 커피 여운처럼 남아 우정으로 쌓인다. 때론 별것 아닌 걸로 서운해지기도 하지만 그게 정을 쌓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커피 종류별로 다른 섬세한 맛의 차이를 잘 모른다. 더구나 덧얹어지는 첨가물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차의 이름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기본 스타일의 커피를 주로 마신다. 내가 느끼는 커피 맛이란 커피를 마실 때 주변 공기의 맛이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주고받는 눈길의 맛이고, 동반되는 음악의 맛이라고 믿는다. 오늘 아침 내가 내린 커피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이유도 여러 가지 수고를 한 후에 얻은 커피여서 그렇다. 어쩌면 스스로 맛있다고 믿고 싶어서 그렇게 맛있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커피 맛이 각기 다른 고유의 성분이나 만드는 방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실증은 많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한 숨을 돌린 뒤, 지고 간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든 한 잔의 믹스커피 맛은 그 어떤 종류의 커피보다 맛있다. 종이컵으로 먹는데도 목구멍이 감동한다. 찻집에서 마시는 일급 바리스타의 실력과 최고급 커피콩의 맛이 무색해진다.

태풍의 한가운데, 맑게 뚫려 조용한 그곳을 태풍의 눈이라고 하듯이 지금 즈음이 가을의 눈에 해당되는가 보다. 하늘은 투명하고 바람이 부드러우며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할 햇볕은 향기롭다. 엊그제까지 햇빛을 피하거나 등지며 산책길을 걸었는데 이젠 해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풍경이 더 정겹다.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노부부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에 내려앉은 햇볕 속에 자연의 포근한 정이 담겨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방죽에 앉아 저물어 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나이 든 아들 장가보낼 걱정을 했다. 어디선가 커피 냄새가 났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박해운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동계훈련으로 전국체전 6위 탈환 노릴 것"

[충북일보] 박해운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이 "이달부터 동계 강화훈련을 추진해 내년도 전국체전에서 6위 탈환을 노리겠다"고 밝혔다. 박 사무처장은 1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전국체전에서는 아쉽게 7위를 달성했지만 내년 전국체전 목표를 다시한번 6위로 설정해 도전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지난달 초 사무처장에 취임한 박 사무처장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선 우수한 선수가 필요하고, 우수한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선 예산이 필수"라며 "전국 최하위권 수준에 있는 예산을 가지고 전국에서 수위를 다툰다는 점에선 충북지역 체육인들의 열정과 땀의 결실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체육 분야에 대해서만 예산지원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향상을 위해 예산 확보를 위해 다각적으로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박 사무처장은 도체육회 조직확대 계획도 밝혔다. 현재 24명의 도체육회 인원을 29명으로 증원시키고 도체육회를 알려나갈 홍보 담당자들에 대해서도 인원을 충원할 방침이다. 박 사무처장은 "현재 도체육회의 인원이 너무 적어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며 "전국에서 가장 도세가 약한 제주도의 경우에도 체육회에 30명이 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