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3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교수

전방지역 초계비행(Combat Air Patrol) 중이었다. 적기의 갑작스런 침투에 대비하여 길목을 지키는 초계비행은 하늘을 지키는 전투조종사의 기본임무다. 북한공군의 비행활동이 뜸한지 연료소모가 적은 순항속도를 유지하라는 관제사의 무전에 잠시 긴장의 끈을 늦춘다. 그날따라 북녘하늘은 맑고 평화로웠다. 손에 닿을 듯 내려다보이는 저 너머에 맞서 싸워야 하는 적이 있다는 사실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임무 시간의 약 절반인 30여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정적을 깨듯 갑자기 항공기 뒷부분에서 '퍽'하는 작은 소리가 나더니 엔진 소리가 약간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엔진계기 상으로는 아무이상이 없었지만 무언가 좋지 않다는 조종사 특유의 육감이 스치면서 서둘러 귀환을 결심했다. 곧바로 관제사에게 상황을 알리고 비행장으로 기수를 돌렸다.

귀환하는 도중 처음에는 미세하게 느껴졌던 기체의 진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지고, 엔진계기도 점차 악화된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엔진이 곧 꺼질지도 모른다는 긴박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단 엔진계기를 살피면서 가장 안정적인 회전수에 '스로틀'(엔진출력을 조절하는 레버)을 고정시켰다. 감소된 추력이므로 천천히 고도를 낮추며 비행장으로 접근하였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행장은 갑자기 몰려든 낮은 구름으로 덮여있었다. 무작정 구름을 뚫고 내려가는 것은 지면에 충돌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계기비행 경로를 택하는 것은 다소 먼 거리를 돌아서 가야하므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진퇴양난이었다. 잘못된 판단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란 것은 자명하였다. 일단 활주로 바로 위에까지 가보자는 판단이 섰다.

그때였다. 비행장에서 약간 비껴난 부분에 논과 집들이 희끗희끗 보일정도로 구름이 흩어진 구멍을 발견했다.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완만하게 선회를 한 후 약간 깊은 각도로 구름을 뚫었다. 구름 아래에는 곧바로 활주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전하게 착륙은 했지만 착륙 후 활주로를 겨우 벗어나자 엔진은 제 일을 마쳤다는 듯 스르르 꺼져버렸다.

"천운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면 공중에서 엔진이 멈췄을 것입니다"

나중에 엔진을 분해해보고 원인을 알게 된 정비사의 말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기의 순간을 넘긴 것이었다.

우리 삶이 그렇듯 비행의 과정도 판단과 선택의 연속이다. 더구나 조종사에겐 시간이 곧 생명이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어느 전자제품회사의 선전 문구처럼 순간순간의 선택이 임무의 성패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마저도 갈라놓는다.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 매 순간의 선택이 오금저리도록 떨리는 일이지만 평소의 일상처럼 비행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기준과 절차'에 있다. 비행 중 접하게 되는 수많은 상황에서도 명확하게 정리된 기준과, 단계적인 절차로 훈련되어 있으면 잘못 선택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날도 항공기의 미세한 변화를 초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안정적인 회전수에 출력을 고정시킨 판단, 비행장으로 직행한 선택들이 결과적으로 무사한 착륙을 가능하게 했다. 중간에 약간의 머뭇거림이나 엔진출력을 변경시켰다면 어떠한 상황으로 변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운명'이란 개념을 자주 인용한다. 선택의 과정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다른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운명이란 지나간 선택의 결과를 두고 되돌아보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선택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덜어보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실상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내가 모르는 힘이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다가올 미래를 '운명'이란 불투명한 기준에 기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범인(凡人)들은 그저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습관화되어서 순간의 선택을,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 "재정 자율화 최우선 과제"

[충북일보] 윤현우 충북도체육회장은 "도체육회의 자립을 위해서는 재정자율화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윤 회장은 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간 민선 초대 도체육회장을 지내며 느낀 가장 시급한 일로 '재정자율화'를 꼽았다. "지난 2019년 민선 체육회장시대가 열렸음에도 그동안에는 각 사업마다 충북지사나 충북도에 예산 배정을 사정해야하는 상황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윤 회장은 설명이다. 윤 회장이 '재정자율화'를 주창하는 이유는 충북지역 각 경기선수단의 경기력 하락을 우려해서다. 도체육회가 자체적으로 중장기 사업을 계획하고 예산을 집행할 수 없다보니 단순 행사성 예산만 도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선수단을 새로 창단한다거나 유망선수 육성을 위한 인프라 마련 등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달 울산에서 열린 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충북은 종합순위 6위를 목표로 했지만 대구에게 자리를 내주며 7위에 그쳤다. 이같은 배경에는 체육회의 예산차이와 선수풀의 부족 등이 주요했다는 것이 윤 회장의 시각이다. 현재 충북도체육회에 한 해에 지원되는 예산은 110억 원으로, 올해 초 기준 전국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