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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아픈 역사' 딛고 희망을 노래하자

1920년 일제강점기 조선 수탈 목적 철도 부설
1928년 12월 25일 조치원~충주 구간 완전 개통
해방 후 제천 봉양까지 연장… 38년 걸쳐 완공

  • 웹출고시간2019.01.31 20:49:22
  • 최종수정2019.01.31 20:49:22

편집자

충북선의 역사는 일제 수탈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일제는 한반도 수탈을 목적으로 철도 부설(敷設)에 열을 올렸고, 충북선도 같은 목적으로 놓였다. 충북, 한반도 발전을 위한 철도가 아닌 식민지화를 위한 철도였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 기저에 깔린 충북선 부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역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이에 본보는 충북선 조치원~제천 구간이 완전 개통되는 역사적·시대적 흐름을 훑어본다.

1958년 12월 31일 충북선개통.

ⓒ 충북도
[충북일보]일제는 조선 침략수단으로 사설철도를 적극 부설했다.

국유철도만으로는 오지지역을 수탈하는데 충분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재정상태도 여유롭지 않았다.

총독부는 사설철도 예정선과 교통경제 상황 등을 조사·수집해 일본 기업가들에게 제공했다.

1914년부터는 일본 자본가들의 위험부담 보증을 위해 보조금도 교부했다.

총독부 철도국은 지방 교통상태에 따라 1기선, 2기선으로 나눠 선로를 선정했다.

1기선은 14개 구간 626㎞다. 충북과 관련된 노선은 성환~장호원(47㎞), 장호원~충주(37㎞), 부강~청주(15㎞) 구간이다.

2기선은 26개 구간 1천924㎞다. 청주~음성(30㎞) 구간이 포함돼 있었다.
ⓒ 충북도
총독부의 계획과 달리 일본 자본가들의 철도 투자는 지지부진했다. 일본 경제계도 불황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았다. 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의 발발이다.

세계대전 특수를 누린 일본 경제계는 전례 없는 호황기였다. 일본 자본가들은 새로운 투자처 물색 중 한반도 철도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선 철도사업에 대한 보조율은 1918년부터 종전 6%에서 7%로 증가됐다. 1919년 9월부터는 8%로 인상됐다.

1914년부터 지급된 보조금과 일본경제의 호황으로 사설철도 부속은 매년 증가했다. 일제는 1920년대에도 사설철도를 계속 부설했다.
ⓒ 충북도
충북선이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들어서다.

충북선이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들어서다. 조선경편철도주식회사는 1919년 9월 동경서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회사명을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로 바꿨다.

조선중앙철도회사는 자본금 1천200만 원으로 1920년 3월 조치원~청주 22.7㎞ 구간 공사를 착수했다.

1921년 11월 1일 조치원에서 청주에 이르는 충북선이 개통됐다.

이어 1922년 5월 청주~청안 23.9㎞ 공사가 착공돼 1923년 5월 1일 청안역에서 개통식이 열렸다.
2단계 충북선 부설은 청안서 충주까지 연장하는 것이었다.

이 구간은 1917년 이미 조치원~충주 사설철도 부설면허권을 취득해 놓은 상태에서 미개업선으로 남아 있던 구간이다.
ⓒ 충북도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는 조치원~청안 구간의 운행실적이 양호한 것에 고무돼 적극적이었다.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는 1924년 청안~충주 실측설계를 끝내고 1925년 3월 공사에 착수, 1926년 11월 30일 준공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1923년 9월 1일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조선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면서 충북선 연장계획이 불투명해졌다.

그러자 도내 북부와 강원 남부지역 유지들은 충북선속성운동(速成運動)을 전개했다. 조선총독부에 진정하는 한편, 충주서는 부지 무상제공 등 기타 편의를 제공키로 결의했다.

여기에다 충남 공주서도 충남·충북선 연락운동이 이어졌다.
ⓒ 충북도
조선철도주식회사는 충북선 부설 문제가 불거지자 1926년 10월 충북선 기공을 결정했다.

1926년 12월 1공구 청안~음성, 1927년 3월 2공구 음성~대소원·대소원~충주 구간이 각각 기공됐다. 1927년 4월 22일에는 충주 사직산 기슭에서 기공식이 거행됐다.

드디어 1928년 12월 25일 충주역에서 지역 유지, 철도 관계자, 신문기자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이 거행됐다. 공사비는 총 834만5천402원이 소요됐다. 길이는 47.4㎞였다.

이로써 조치원~충주 91.7㎞에 이르는 충북선이 완전 개통됐다.

1930년께 조선땅에는 △충북선(조치원~청주, 청주~청안, 청주~충주) △경북선(김천~상주, 상주~점촌, 점촌~예촌) △경남선(마산~군북, 군북~진주) △황해선(내토~상해, 사리원~재령, 재령~신천, 화산~미력, 미력~하성) △함남선(함승~장풍, 오노~신흥, 신흥~송흥) △함북선(고무산~신참, 신참~무산) △장항선(천안~온양, 온양~예산, 예산~홍성, 홍성~광천, 광천~남포) △안성선(천안~안성, 안성~죽산, 죽산~장호원) △동래선(부산진~동래) △평안남도 신안주~천동 △강원도 철원~금화, 금화~금성, 금성~탄감리, 탄감리~창도, 창도~현리, 현리~화계 등 전국 곳곳에 거미줄처럼 사설철도가 놓이게 됐다.
ⓒ 충북도
충북선 조치원~충주 구간 개통 이후 제천까지 연장을 위한 문제는 지역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충북 인사들은 충북선을 서해안과 동해안을 잇는 중부조선의 횡단철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오지 물자수송을 통한 지역개발과 산업 진흥을 꾀하고자 했다. 1929년 1월11일 제천지역 유지들은 제천 공회당에 모여 제천까지 충북선 연장을 요구했다.

이들은 '제천은 충북의 제일가는 오지로 교통이 불편하지만 옛날부터 상업이 발달한 곳으로 철도가 부설되면 제천뿐 아니라 인근 영월 등지까지 발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시종 지사보다 90년 앞서 '영충호시대'의 개척을 주창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1935년엔 충남북·전북 3도의 연합으로 충북선 연장운동이 확대됐다. 이때 목표는 충북선을 동해안까지 연장하는 것이었다.
ⓒ 충북도
당시 충북선은 다른 철도노선에 비해 영업수익이 좋았다. 조선철도주식회사로서도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여파와 일제의 대동아건설과 같은 전시체제하에서 물자 제한과 자금력 부족으로 착공하지 못했다.

충북선은 제천까지 연장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충북선 제천 연장공사는 1955년 11월 들어 이뤄졌다.

충주~봉양 35.2㎞ 연장은 경제부흥에 필요한 기간산업을 육성하는데 시급히 요청됐다.

우선 충주~목행 6.1㎞가 1955년 11월 17일 ICA 원조에 의해 착공, 1956년 4월 11일 개통했다.

목행~봉양 연장은 14공구로 나눠 시공됐다. 이 공사는 길이 1㎞의 백악을 비롯해 총연장 3천229m에 달하는 8개의 터널과 길이 426m의 남한강을 비롯한 교량 14개소, 신설정거장 4개소가 있는 난공사였다.

일제시대인 1920년대부터 이어진 충북선 제천 연장 공사는 해방 13년이 지난 1958년 12월 31일 마무리됐다.

다음해인 1959년 1월 10일 조치원에서부터 제천 봉양에 이르는 94㎞ 충북선 전통식(全通式)이 거행됐다. 장장 38년에 걸친 충북발전 젖줄의 완성이었다.

/ 성홍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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