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어디선가 조화(造花)를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경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아마 누구라도 조화보다는 생화의 향기와 자연스런 생명력을 윗길로 칠 것이다. 무척이나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생화인 줄 알고 살짝 만져 봤다가 종이나 헝겊의 뻣뻣한 감촉에 실망한 적도 있다.

운전을 하고 다니다보니 라디오를 듣게 되는 때가 많다. 어떤 프로그램의 편지 사연에 사남매를 키우신 한 어머니가 조화 한 다발로 두고두고 사남매의 졸업식에 모두 활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알뜰함에 절로 웃음이 났다. 십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그 꽃은 비닐에 곱게 싸여 안방 벽에 계속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조화꽃 한 다발도 가히 집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가구 정도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리라.

며칠 후 또 다른 라디오 사연을 듣게 되었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어느 20대 딸의 사연이었다.

"아무 의욕 없이 거의 누워만 지내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 공원에 산책을 나가시더니 손바닥만한 화분을 주워 오셨어요. 화분에는 앙상한 가지에 나뭇잎 몇 개만 달랑 붙어 있더군요. 어머니는 그 나뭇가지에 종이로 예쁜 꽃을 몇 송이 만들어 붙이셨어요. 그러고 물끄러미 그 꽃을 바라보고 계시더니 '얘, 나 어디 다니면서 뭣 좀 배워볼까'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만드신 꽃이 너무 예뻐 사진으로 보내드립니다."

사연을 읽은 라디오 진행자는 정말 꽃이 예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라디오라서 그 종이꽃 사진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처음으로 종이꽃을 보고 가슴 뛰었던 때가 생각났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닌 편이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쯤 수원으로 이사 갔을 때였다. 옆집의 중학생 누나가 나를 귀엽다며 예뻐해 주었다. 누나는 자주 나를 집으로 데려가 숙제도 돌봐 주고 공부도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은 다락방에 올라가 이것저것 주섬주섬 찾더니 갖가지 빛깔의 얇은 종이를 갖고 내려와 뭔가를 접기 시작했다. 누나의 손가락 끝에서는 여러 가지 예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니 한지 종류의 종이가 아니었나 싶다. 어두운 다락에 묻혀 있던 종이들이 환한 햇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던 정경을 경이롭게 바라보던 내 눈길에 누나는 더 자랑스럽게 꽃을 만들어 내밀었던 것 같다.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주쳤던 종이꽃이었다. 이후 수없이 조화를 보게 되었지만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이제 그 어머니의 종이꽃에 얽힌 라디오 사연을 듣고 보니 문득 그 누나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었던 종이꽃이 마음에 오롯이 다시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 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화가 할아버지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려놓은 담벼락의 푸른 잎 한 장에 삶의 의욕을 되찾는 존지의 이야기 말이다. 자연이 피워낸 생화도 아름답지만 인간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조화도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라디오 사연의 어머니가 다시 아름다운 생의 꽃을 피워내셨으면 좋겠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