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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단단한 옥광밤을 푹 쪄냈다. 적당히 식은 밤을 이빨로 동강 자르니 뽀얀 속살이 둘로 나뉜다. 포실한 밤을 입에 넣기도 전에 침이 먼저 마중 나온다. 역시 달다. 단맛 뒤에 쌉싸래한 맛이 입안을 감돈다. 풋밤 같던 아들의 떫은 시절이 떠올라서다.

아들의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터널만 지나면 얼추 다 온 셈이라고 옆에 앉은 이가 말했다. 시간 안에 닿지 못할까 졸였던 마음이 일순 풀어지자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둔덕에 키 작은 나목들이 간격을 맞춰 서 있고, 기계충 먹은 가르마처럼 삐뚤빼뚤한 임도가 나무 사이로 나있었다. 저 멀리 늙은 할미의 젖무덤 같은 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골을 품고 있어 동네가 아늑해 보였다.

우묵하게 들어앉은 곳에 아들이 다닐 학교가 있었다. 식을 마친 아들은 3년 동안 기거할 방으로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무연히 창밖을 내다보던 아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고개를 돌리는 아들 눈빛이 백 마디, 천 마디 말을 품고 어미를 바라보았다. 집을 떠나 홀로 지내는 것도, 학업에 대한 부담감도 힘겨울 테지만 무엇보다 하루아침에 집안 살림이 애옥해졌으니 그 마음이 오죽하랴. 물기 번지는 눈을 바라보며 손을 그러잡았다.

어느새 밖이 어둑어둑해졌다. 한 계절 덮을 이불과 여남은 벌의 옷, 공부할 책 등을 정리하는데 어빡자빡 손이 맞질 않았다. 학교와 집 거리가 천리만리도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하룻길이었다. 당장 비 가릴 일이 걱정인 우리 사정으로는 언제 오마 기약할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아들 손등만 쓸어내리다 방을 나왔다. 허허벌판에 씨알 하나 떨궈 놓고 오는 발걸음이 허공을 밟듯 자꾸만 휘뚝거렸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하루 공부가 끝나면 아들은 공중전화에 매미처럼 붙어 속말을 꺼내놓았다. 너무 춥다고,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말은 사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삶에 발이 묶여 갈 수 없는 오활한 어미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다시 겨울이 온 듯 추웠다. 무엇 하나 넉넉히 해줄 수 없는 어미는 부러 쾌활한 척 목소리를 높여 맞장구쳐줄 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면 황무지 속 잡목 같은 아들이 안쓰러워 눈물을 훔쳤다.

오랜만에 찾은 학교 뒷산이 울울했다. 입학식 때 보았던 뒷동산 나무들이 밤나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 고장 밤나무는 토종이며 명품이라고 흔연스럽게 말하는 교장 선생님 눈에 나무와 학생이 일체로 보였나 보다. 밤나무 예찬이 학교 자랑으로, 아이들 자랑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아들은 다행히 오월의 밤나무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하나 어디 저절로 크는 나무가 있을까. 때맞춰 물도 주고 거름도 주며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하건만, 자주 올 수 없는 어미가 행여 아들에게 아픈 옹이나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되었다.

태풍이 자주 불었다. 아름드리나무조차 거센 바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가지가 꺾이고 열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광풍은 나무에만 불지 않았다.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며 아들은 포기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웬만한 일은 우직하게 견뎌내던 아들도 성적 앞에서만은 의연할 수 없었으리라. 싱싱하던 잎사귀가 누렇게 뜨고 말갛던 얼굴이 어둡게 그늘졌다. "힘내라"는 맥없는 말이 무슨 효력이 있을까마는 비손하듯 혼자 되뇌고 또 되뇌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왔다 갔다. 그사이 뒷동산 알밤도 단단히 영글고 풋열매 같던 아들도 야무진 결실을 보았다. 대학 입학이라는 열매는 아들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골에서 불어오던 시린 바람이, 정수리를 내리쬐던 뜨거운 볕이, 총총 빛나던 별이 합력하여 옹골찬 아람을 만든 것이다.

포기를 딛고 얻은 열매라서 그런지 반짝반짝 광이 났다. 자연을 품은 아들은 지혜의 나이테를 두리두리 몸에 새겼으리라. 비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을 다부진 근성도 마음에 다졌으리라. 졸업식장에 앉았다. 단상을 오르는 아들 뒤통수가 여느 날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덥석 밤을 깨무는데 삼십여 년 전 친정엄마가 했던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야야, 애기 머리통이 꼭 깎아놓은 밤톨 같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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