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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희

수필가

영화는 밝고 경쾌하게 시작한다. 언어학자로, 세 아이의 엄마로, 또 한 남자의 아내로 평온하게 살던 앨리스에게 밤안개처럼 불행이 스며든다. 알츠하이머란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다. 가족들 모르게 요양병원에 다녀온 날, 앨리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없어지기 전에 미래의 자신에게 영상 메시지를 남긴다.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 지영이다. 외국에 살던 지영이는 완전히 귀국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먼저 전했다. 다음 주에 만나자는 말끝에 승희는 아마 못 나올 거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내게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을 같은 학교에 다닌 네 명의 친구가 있다. 우리가 쌓아온 긴 세월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있는 게 아니다. 눈물 콧물을 흘려야 했던 애절한 사연도 새겨져 있고, 세상의 쓴맛 단맛을 맛보았던 가슴 아픈 이야기도 담겨있다.

우리는 서로를 무시로 챙겼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땐 육친보다 더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특히 지영이와 승희는 친정집까지 나란히 붙어있어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그야말로 단짝 중의 단짝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영이도 반가웠지만 그 자리에 없는 승희가 더 궁금했다.

"얘들아, 승희가 아파"

제 잘못이라도 된 양 지영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앨리스는 스스로 염려한 대로 사랑하는 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우연히 영상을 본 앨리스는 화면 속 자신이 시키는 대로 위층으로 올라가 영원히 잠들게 하는 약병을 가지고 내려온다. 뚜껑을 열자 허공으로 흩어진 그녀의 기억처럼 어두운 바닥 위로 하얀 약들이 좌르르 쏟아진다. 그 순간 간병인이 들어오며 죽음의 알약은 형형색색 아름다운 빛깔로 변한다.

믿을 수가 없다. 승희가 치매란다. 이제 오십 중반을 넘긴 친구가 치매라니, 일러도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철부지 아이들 과외로 생계를 꾸려온 승희. 피붙이들에게는 하염없이 퍼주고 스스로에겐 인색했던 승희. 여툰 돈으로 힘겹게 살아온 친구에게 신의 자비는 없었다. 애면글면 살아온 시간이 되레 독이었나 보다. 인내와 침묵의 시간이 뇌를 잠식하고 마음을 멍들게 했나보다. 선의의 끝이 왜 해피엔딩이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얼마 전 부쩍 몸도 마음도 힘들다고 했는데…. 그때 이미 기억을 갉아먹는 병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구나. 우리는 눈뜬장님이었구나.

"어쩌니, 어쩐다니. 우리 승희 불쌍해서 어쩐다니"

터져 나오는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한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욱 자주 만난다. 젊을수록 병의 진행속도가 빠르다더니 승희의 시간은 뒤로 휙휙 흘러간다. 쌓아 놓은 추억을 꺼낼 때마다 친구는 열 살이 되고 열다섯 살이 된다. 그럴 때면 친구의 기억 여행에 기꺼이 동참한다. 어느 날, 승희 사진첩 속에 있는 흑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다섯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거기 있었다. 그날, 흑백사진과 똑같이 자리를 잡고서 사진을 찍었다. 승희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추억을 우정의 사진첩에 꽂아 넣었다.

앨리스는 죽지 않았다. 스크린 속 그녀는 지난날 기억은 사라졌지만, 앨리스와 추억을 기억하는 가족과 함께 여전히 앨리스(Still Alice)로 잘살아간다. 우리 친구 승희도 행동이 굼떠지고 어둠 속에 있는 단어를 찾느라 말은 느리지만, 엄마로서 아내로서 잘 버텨내고 있다.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가족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앨리스의 슬픈 독백은 어쩌면 승희가 하고 싶은 말일지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걸까. 함께했던 추억과 사랑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여전히 '나'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가슴 아픈 여운이 극장 문을 나서는 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른다.

친구의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강물처럼 흘러도 승희에게 새로운 날은 오지 않으리라. 함께한 오늘도 금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테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옛 기억도 조만간 까만 점이 되어 완전히 소멸되리라.

승희야, 네 기억 속에서 우리가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너를 기억할거야. 우리는 영원한 친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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