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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12.28 14:25:59
  • 최종수정2023.12.28 14:25:59

김경순

교통대 커뮤니티센터 글쓰기 강사

'잠시 삶의 여유가 그리울 때… 위안이 되길 바래요. -당신의 only Love-'

겉표지를 넘기면 제일 앞장에 쓰여 진 글귀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며 썼을 것이다. 글씨는 작고 각지지 않으며 부드럽다. 아마도 이 책의 주인은 남자일 것이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선물 받은 것일 게다. 헤르만 헤세의 『죽음에 관한 사색』, 그런데 책의 제목으로 보아 책을 선물한 이도 받은 이도 어느 정도 인생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몇 년 전 서재 겸 공부방으로 사용하던 곳의 책들을 정리한 때가 있었다. 20년 가까이 했던 논술지도 일을 그만 두면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교재와 책들을 모두 한데 모아 보니 1t 트럭으로 한 가득이었다. 근처에 고물상이 있어 그곳으로 싣고 가기로 했다. 사실 고물상에 팔기로 마음먹기까지 고심을 많이 했더랬다. 그간 논술로 사용했던 책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검증받은 좋은 책들이기에 여기저기 수소문해 기증할 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되거나 훼손된 책들은 받지 않으며 더구나 최근의 책들만 받는다고 했다. 내게 있던 책들은 수업을 위해 꼼꼼히 읽어야 해서 줄을 긋거나 메모가 된 게 대부분이었다. 아깝고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폐지로 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재를 정리하면서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기도 하고 소장하고픈 책들은 남겨 놓았다. 그리도 많은 책들을 정리했건만 어느새 책장이 빈틈이 없이 채워졌다. 책 욕심이 많아 인터넷 검색을 하다 좋은 책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구입을 한다. 버릇인지, 습관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병인 듯싶다. 요즘은 일에 치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지만 예전에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겼다. 오늘 손에 들은 책도 20년 전쯤 헌책방에서 500원을 주고 구입한 책이다. 헤르만헤세가 지은 이 책은 죽음과 노년에 대한 단상들을 모아 놓았다. 헌데 책을 다시 읽다보니 20년 전과 지금 공감하는 부분은 다른 듯하다. 마음이 동하는 부분에 밑줄을 긋는 버릇이 있다 보니 그때의 생각, 느낌, 마음까지도 알 수 있어 한 편으로는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은 밑줄은 긋지 않은 많은 부분들까지 마음에 와 닿는다. 아마도 그건 어느새 나도 노년과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명작은 오래되어도 빛이 발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그 값어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다. 허나 그건 책의 깊이와 넓이를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모든 게 저울의 수치로 판정하는 고물상에서는 말짱 허사다. 그날, 한가득 책을 실은 1톤 트럭의 무게를 재던 고물상 주인 곁에서 나는 쭈볏쭈볏 말을 걸었다.

"저 책들이 정말 좋은 책들이에요. 값으로 치면 1천만 원도 넘을 걸요?"

하지만 대문호도 베스트셀러도 알지 못하는 고물상 주인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보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 주고는 차를 빼라는 재촉의 눈빛으로 대답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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