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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舊 한 길을 걷다 - 3대째 이어온 영동전통시장 터줏대감

해방이후부터 1대 박용보 사장 시작으로 3대 박준희 사장까지
1955년부터 아버지 돕던 2대 박창훈 사장 "손님들 위해 최선"
국회의원 보좌관 하던 막내아들 …가게 잇는다고 했을 때 반대

  • 웹출고시간2016.03.03 19:23:57
  • 최종수정2016.03.03 19:37:05

3대째 영동전통시장을 지키고 있는 신발가게 동양고무.

[충북일보=영동] 영동에서 3대째 가업을 잇는 신발가게 동양고무.

영동전통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이기도 한 동양고무는 해방 후부터 시장을 줄곧 지키고 있는 영동의 산 증인이다.

1990년 돌아가신 1대 박용보, 2대 박창훈(79), 현 사장인 3대 박준희(47)씨로 이어지며 그때 그 시절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허름해 보이지만 할아버지, 아버지의 어려웠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소중한 일터다.

70년의 역사를 가진 최고령 동양고무의 박 사장은 고객들에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친절은 선조들이 지켜온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아 한 치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오늘도 혼신을 다하고 있다.

3대인 박준희 사장이 신발가게를 찾은 고객에게 정성을 다해 장화를 골라주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40~50년 된 단골손님들이 주를 이룬다. 장날이면 가게를 찾아와 안부를 물으며 반가워하는 등 정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박 사장의 이력도 이색적이다. 4명의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영동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의 유명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해 여론조사 회사에 다녔다.

2000년 국회 정기 감사 기간 때 한나라당 전용학 의원의 부족한 일손을 도와 준 것이 계기가 돼 보좌관 일에 뛰어 들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2013년까지 전 의원을 비롯, 김충환, 김학원, 양정례 의원 등 13년 동안 4명을 보좌했다.

당시 같이 시작한 보좌관 동기생 15명중 이제는 1명만 남을 정도로 보좌관 일이 보람도 있으나 힘이 드는 등 쉽지만 않았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평생직장이라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정치생활을 과감하게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는 결심은 했으나 아내와 부친을 설득해야 했다.

"좋은 자리를 놓고 왜 내려오려 하느냐"는 아버지의 반대가 컸다. 부친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언제까지 좋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다 정치는 나이 들면 전문성에 한계가 있고 시간이 더 가기 전 고향으로 내려가 부친의 가게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에서 였다.

이렇게 극복하고 신발가게를 이어 받은 지 3년.

동양고무 신발가게 시작은 이렇다.

1990년에 작고한 1대 사장인 할아버지는 장손으로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손재주가 유난히 좋았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4살 때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직물회사에 다니게 된다.

큰 나라에 가서 돈을 벌고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10여 년간 중국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직책을 얻게 됐고 큰 돈은 아니지만 생활에 여유를 찾을 만큼은 됐다.

해방이 되면서 중국생활을 청산하고 옥천 고향으로 돌아 온 할아버지는 신발도매업을 하는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장소에서 난전을 벌였다.

처음엔 신발을 자전거에 싣고 이원, 심천, 학산 등 시골장터를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팔았다.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내 사업이라는 마음에서 뿌듯했다.

고무신, 운동화, 장화 등을 취급하다가 조그맣게 가게를 냈다. 피난 시절이어서 환경이 변변치 못해 기름통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는 등 비가림 정도의 임시로 허름한 가게를 꾸몄다.

대가 이어가며 운영하고 있는 신발가게 앞에서 2대 박창훈(왼쪽), 3대 박준희 사장이 정답게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때부터 2대 사장인 박창훈씨는 부친을 도우며 고등학교를 다녔고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다.

부친의 신발가게를 도운 것은 1955년부터다. 2대 역시 3남매 중 장남이어서 아버지의 가게를 열심히 도왔다.

이렇게 시작한 신발가게 운영은 50년이 훌쩍 넘었다. 현재 영동전통시장에는 3~4곳의 신발가게가 있을 정도인데 번창했던 시절은 가고 지금은 사양 사업이 됐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1대 사장 박용보씨는 가게를 운영하명서도 검소한 중국인을 생활을 본받아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되 사치와 외상은 절대로 하지마라"라고 늘 상 자식들에게 가르쳐 마음에 새겼다.

특히 검소하면서도 꼬장꼬장 해 크게 돈은 벌지 못했어도 비리나 부정은 물론 거짓말도 할 줄 모르는 대꼬챙이 같은 성격이었다.

이 같은 성격 때문에 자손들 역시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 받아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2대 사장 박창훈씨는 "현 사장인 막내가 갑자기 서울생활을 접고 가게를 한다고 할 때는 말도 되질 않아 반대했다"며 "자식고집 이기는 부모가 있느냐,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하겠기에 이왕이면 하고 싶어 하는 막내에게 운영을 맡기기로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자신보다 더 잘 운영을 하고 있어 전수해 줄게 없게 됐다"며 "한때 손님들이 신발을 사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지어 서기도 했는데 이제는 산업사회에 밀려 사양사업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그동안 손님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렇게까지 될 수 없었다"며 "지금까지 이용해 준 고객들에게 고마워 마음의 보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한 업종에만 고집스러워서 인지 아버님은 점쟁이처럼 손님들의 발만 보면 신발크기는 물론 성격까지 척척 알아 맞출 만큼의 전문가였고 살인사건의 범인이 신은 신발자국을 가져와 경찰이 물을 정도였다고 박 사장은 귀띔을 했다.

박 사장은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하며 "머리만 잘 쓰고 노력하면 틈새가 보이는데 어려운 일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찾는 지금의 세대들의 세태가 안탑까다" 고 꼬집었다.

또 그는 "신발가게를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좋아서 하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으며 시장사람들이 참 좋고 서민들의 부대끼며 생활하는 삶의 현장"이라며 "만약 아들이 가게를 한다고 한다면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영동 / 손근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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