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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이안눌과 호서록

원래 청풍향시 감독, 오가는 동안 남한강 경치 흠뻑매료
도담 등 가는 곳곳에 한시… 연결하면 그 자체가 기행문
남한강 '청풍호', 조선시대에는 '청초호'라는 별명지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지은 이행은 충주 달천으로 유배

  • 웹출고시간2015.10.12 20:29:49
  • 최종수정2015.10.12 20:30:00

이안눌 초상화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안눌(李安訥·1571-1637)이 있다.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다. 서울 남산 아래 살았던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을 하나 동료의 모함을 받아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정거는 일정기간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는 가학(家學)을 하면서 문학을 집중적으로 연마하였고, 이 시기에 그 유명한 동악시단(東岳詩壇)이 형성된다.

동악시단은 이안눌이 주축이 돼 결성된 일종의 시(詩) 동호인회로, 정철(鄭澈)의 제자였던 권필, 선배인 유근수, 평생의 맞수였던 이호민·홍서봉·이정구 등이 참여하였다.

그가 끝까지 출사(벼슬살이)를 마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하였고, 32세 되던 해에 우리고장 청풍부의 경시관(京試官)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조정은 지방에서 치뤄지는 향시(鄕試)를 감독하기 위해 시험 감독관을 지방의 과거 시험장에 종종 파견하였고, 이를 경시관이라고 불렀다.

시험 감독관으로 파견되는 만큼 현지 체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아안눌의 청풍 체류기간도 길지 않았으나, 이때 〈호서록〉(湖西錄·동악집 제 4권)이라는 연작 기행시가 쓰여졌다.

조선시대 제천·청풍·단양·영춘 등 우리고장 북부 4군은 산수가 매우 뛰어나다는 뜻에서 '사군산수'(四郡山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 바로 이안눌이다. 그는 청풍부 경시관이 돼 청풍·단양 등을 유람한 후 '사군산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헌상 '사군산수'라는 표현은 이안눌의 '유구담'에 처음 등장한다.

사군은 산수의 본향이다. 그중에 구담의 경치가 최고인데 모나게 우뚝선 옥순봉과는 급하고 가파르게 달려 서로 잇닿아 있다. 그 아래로는 흐르는 물이 돌아나가고 거센 여울 맑으니 또한 옥이로다(四郡山水鄕。龜潭境最勝。矗立玉筍峯。奔山+肖相連亘。淙流匯其底。激湍淸且瑩).'-<동악집 제 4권, 호서록 중 유구담(遊龜潭)>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 그리고 한진호(韓鎭戶+木·1792-?)의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 등에서 보듯 남한강 물길 여행기는 산문으로 적어야 묘사가 충실한 기록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이안눌의 남한강 물길 연작시는 충주, 청풍의 풍수혈, 청초호(靑草湖), 북진, 한벽루, 응청각, 도담, 황공탄, 충주 금탄, 부탄 등 지나는 곳곳 모두를 빼어난 서정과 사실성을 바탕으로 표현, 그 자체가 하나의 기행 기록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청풍 사람들은 한벽루와 금병산 수역을 '청초호'라고 불렀다. 지명은 수몰로 인해 완전히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는 대중성을 꾀나 지녔다. 지명 청초호는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1863년)에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 사이에 청풍 응청각도 한벽루 만큼이나 이름이 높았다.

'금병산(錦屛山) 아래에 있다. 강이 나뉘어진 한 갈래의 물이 모여 호수가 되었는데 물색이 마치 쪽빛과 같다.'(在錦屛山下江分一派渚湖色如藍)

청초호는 쪽빛의 물색 외에 주변에 바람굴(風穴)과 물굴(水穴)이 존재하는 것으로도 유명했고, 〈1872년 청풍부〉 지도에 세 지형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는 〈호서록〉 도입부에서 대략적인 여정을 미리 기술,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 있다.

'1602년 가을 8월 6일 충청좌도 경시관의 임무를 띠고 청풍군으로 떠나, 12일 청풍에 도팍하여 13일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17일 시험을 끝냈다. 경시관은 다음 18일 단양으로 가서 도담을 구경하고, 19일 청풍으로 돌아왔다. 20일 배를 타고 청풍을 출발하여 25일 경성으로 돌아오니 왕복 20일의 여정이었다.'-<〃>

'1872년 청풍부지도' 의 모습이다. 청초호, 풍혈, 수혈 등의 지명이 보인다.


음력 8월 초순이면 무더위가 물러간 뒤로 선선함이 감돌게 된다. 그는 그해 8월 6일 청풍으로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넜고, 그 모습을 '연일 내리던 비 오늘 아침에는 활짝 개어 / 가을 하늘 높고 날씨는 선선하다. / 잔잔한 호수 밝고 희며 / 저 멀리 나무들 안개 속에 푸르러라.'라고 적었다.

그가 한강을 건넌 후 우리고장 충주까지 땅길로 왔는지, 물길로 왔는지 남겨진 시로는 불분명한 면이 있다. 느낌상 남한강 물길로 소강을 한 것 같으나 확인은 잘 안 된다. 그는 충주목으로 들어와 '충주관에 묵으며 밤비에 감회를 적다'(留忠州館 夜雨書感)라는 시를 지었다.

'쏴아쏴 빗소리 급하고 / 쉬익쉬익 가을 기운이 새롭네. / 공조에서 낭관이 되었지만 / 글자를 안다고 다 시인이 아니라./ 사흘을 묵은 이 땅에 / 백년 한 평생을 떠도는 이 몸 / 가을 귀뚜라미 침상 밑 가까이 있어 / 밤새도록 서로 슬프게 하소연하는구나.'-<〃>

그는 시험감독도 감독이지만 한양을 떠날 때부터 익히 청풍의 빼어난 풍광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청풍 하류인 북진을 지날 때 '내일은 응청각 높은 누각에서 / 긴 젓대 한 소리로 구름에 쌓인 병산을 마주하리라.'라고 표현, 시험 감독보다 명승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나타냈다.

인용문 가운데 '젓대'는 대금으로 많이 알려진 전통악기로 달리 횡적(橫笛)이라고도 불렀다. 청풍의 누정은 한벽루가 많이 알려졌지만, 응청각(凝淸閣)도 꾀나 깊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응청각에 대해 '누각의 이름은 퇴계선생이 명명한 것이다. 당나라 때의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시 '한가롭게 잠에 드니 맑은 향기 엉기네(燕寢應淸香)에서 취하였다. 공은 위응물 시의 운을 떼서 시를 지었는데 지금은 문미에 그 편액이 걸려 있다.'라고 관련 시를 설명하였다.

그가 과거시험 감독보다 청풍의 빼어난 풍광에 매혹됐음은 '한벽루 벽에 쓰인 시에 차운하여 송명재께 올려 화답과 가르치을 구하다'라는 긴 제목의 한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충주댐 완공 전의 한벽루 모습이다. 지금은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했다.

'/…/ 강 위에서 누가 옥피리 부는가 했더니 / 수령께서 일이 없어 난목의 배를 준비해 두신 것일세. / 내일 아침 과거 끝나면 흥을 낼 수 있으리니 / 긴 낚싯대 잡고 돌섬에서 낚시가 해보렵니다.'-<〃>

그는 시험 감독이 끝나자 단양 도담을 둘러본 후 청풍으로 되돌아와 한양을 향해 하강(下江)을 시작하였다. 이안눌은 소강 때 충주관에서 묶었던 것과 달리 하강 때는 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금탄'(金灘)을 지나갔다.

금탄은 충주 탄금대 건너편으로 고려~조선시대에는 '금천'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여기서 쇠벼라·가금·금가 등이 지명이 생겨났다. 금탄은 외증조부 읍취헌 박은(朴誾·1479-1504)이 시를 지은 장소이기도 하다.

박은은 조선시대 으뜸가는 한문 시인으로 17세에 지금의 고시에 해당하는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외종조부의 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공은 시에서 '여울물 소리 시 읊조리는 소리에 가깝고, 산색은 봉창에 비쳐든다라고 노래하였고, 또 스륵스륵 회나무 삼나무 흔들리는 신륵사의 달밤, 푸르고 너른 강 위에 부는 비바람 속에서 두미로 가는 배'라고 썼다.'-<〃>

'여울물 소리가 시 읊조리는 소리에 가깝다'고 한 표현은 박은이라는 이름 앞에 왜 '조선시대 으뜸가는 한문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도 외증조부의 시를 모방해 '산색과 여울물 소리 완연히 예전과 같으련만 / 회나무 삼나무에 비바람 부니 그리는 정 이기지 못하네.'라고 감회를 남겼다.

가흥 하류에 위치한 복탄여울도 물살에 세기로 악명이 높았다.

남한강 여울은 소강 때 특히 문제가 됐지만 그렇다고 하강 때 마냥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물살이 너무 빠른 경우 위험하였다.

그는 여울을 너무 빠르게 내려가는 배의 모습을 마치 '산비탈을 구르는 새알 같다'고 표현하였다.

'곧은 길이니 길 가는 것 어려움을 어찌 걱정하리 / 큰 강 가을 물이 살풍경하게 급히 흐른다. / 늘그막의 세 노인이 나를 이끌어 가지만 / 여울을 내려가는 배는 산비탈 구르는 둥근 새알같다.'-<〃>

다음 시에는 충주의 복탄도 등장한다. 이곳의 복탄나루는 남한강의 앙성면 조천리와 소태면 중청리를 잇는 나루터였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하늘가에 지는 햇살 장대의 절반쯤에 남았고 / 나그네 실은 배 막 떠나려하니 쪽 빛이 차갑구나. / 용담의 물 쏜살같고 가을바람 거센데 / 겨우 저탄을 지나니 다시 복탄이로구나.'-<〃>

이안눌의 가문은 남한강 물길과 또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작은 증조부는 이행(李荇·1478년 ~ 1534)이다. 그는 그 유명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을 편찬한 인물로, 갑자사화 때 남한강 지류인 달천 유역으로 유배를 왔다.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 이생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 / 늘 채소만 먹는 내가 가련했나 봐 / 그나마 채소 음식도 더러 떨어져 / 어처구니없게도 소반이 텅 비었지 / 날 저물 무렵 어린 종이 달려와 / 화급히 내 집을 두드려 나가 보니 / 버들가지에 꿴 서른 마리 물고기 / 머리와 꼬리 모두 서로 이어졌더라'-<적고록>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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