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황후가 된 우리고장 진천 출신 吳공녀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그 가운데 양무공파(襄武公派)에 속한다. 『보성오씨 양무공파 세보』 에 의하면 양무공파는 1세조 현필(賢弼)부터 9세 윤정(允貞)까지는 인명과 계보가 다소 불확실하다. 따라서 “구전 족보의 기록을 기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는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10세 현우(玄祐), 11세 용권(用權), 12세 맹손(孟孫), 13세 자경(子慶·오황후 고조), 14세 연순(延純·오황후 증조) 등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14세 연순은 찬(璨), 희(希), 집(執) 등 3형제(15세)를 뒀고 이 가운데 ‘집’이 오황후의 조부가 된다. 그는 슬하에 오황후의 친부인 오척을 비롯해 비(備)·엄(儼)·한(한人+閒)·부(傅)·전(佺) 등 6형제(16세)를 뒀다. 이 가운데 오척은 맹선(孟璿), 숙선(淑璿) 등 두 아들(17세)을 뒀고, 이들이 오황후와 오누이간이 된다. 비·엄·한·부·전 등 오황후의 삼촌에 해당하는 5형제는 모두 현감 이상의 품관에 오르는 등 입신출세하였다. 오비는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정5품)을 거쳐 통훈대부(정3품)에 올랐다. 오엄은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역임하
정유년 닭의 해가 시작됐다. 닭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대 중국의 진나라 진수가 쓴 『삼국지』이다. 그 가운데 한전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出細尾鷄 其尾皆五尺餘’(출세미계 기미개오척여), 의역하면 ‘동이 즉, 한국에서는 가는 꼬리의 닭이 나오는데, 그 꼬리의 길이가 모두 5척 남짓하다’ 정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가 쓰여진 원삼국시대에도 닭이 길러졌음을 알 수 있다. 닭은 우리나라 고전문학 작품 속에도 등장한다. 의 크라이막스는 아버지의 눈을 띄게 하기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가는 대목이다. 그날 심청이는 이렇게 자탄했다. ‘닭아, 닭아, 우지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섧지 않으나 / 의지 없는 우리 부친, 어찌 잊고 가잔 말가.’ 닭과 과련된 우리말 중에는 잘못 쓰이고 있는 것도 있다. ‘영계’라는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을 뜻하는 속어인 영계를 영어 Yong과 한자 닭계 자의 결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계는 우리말 단어 ‘연계’가 잘못 알려져 사용되는 경우다. 연계는 한자 ‘연할 연’(軟)자 와 닭계(鷄)자로, 연한 닭이라는 뜻이다. 연계의 반대
한확(韓確 , 1403~1456)은 청주가 관향으로, 태종~세조 등 4임금을 모셨다. 그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등 영달을 누렸다. 그 바탕에는 여말선초의 공녀(貢女) 제도가 있었다. 그는 누이에 이어 막내 여동생(한계란)을 명궁에 공녀로 전헌하였다.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하고, 칼로 제 침구(寢具)를 찢고 갈마 두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흩어 주니, 침구는 장래 시집갈 때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이었다.’- 한양도성 안 사람들은 한계란의 그런 명궁행을 ‘생송장’이라고 부르며 슬퍼하였다. ‘도성 안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하였다.’- 조선 조정은 공녀 간택에 대한 대가로 친권자인 친부에게 승진의 혜택을 줬다. 우리고장 진천 사람이면서 자신의 딸을 명궁에 공녀로 진헌한 오척(吳倜)도
고려 원종은 무신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종은 그 과정에서 여원(麗元) 연합군의 힘을 빌렸고, 고려는 그 대가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사위나라 고려에 대해 공녀(貢女) 등 각종 공물을 요구하였다. 고려 공녀의 표면적 구실은 몽고가 전쟁 수행 중에 획득한 수십 만 명의 포로병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준다는 일종의 위무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려 여자에 대한 야욕 충족과 반몽 의지를 무기력하게 하려는 고등술책이 숨어 있었다. 1275년(충렬왕 1) 10인의 처녀를 보낸 것을 시초로, 공민왕 초기까지 80여 년 동안 수많은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공녀에 따른 폐단은 매우 대단, 충렬왕은 나라 안의 혼인을 금하기도 하였다. 또 1287년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먼저 관에 보고한 뒤에야 시집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공녀는 주로 13~16세의 처녀를 대상으로 하였다. 금혼령의 여파로 당시 고려에는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도 하고,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동녀(童女)의 수는 많게는 40~50명에 이르
역대 민선 청주시장 가운데 나기정(羅基正) 시장은 유독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문화시장'을 자임하였고, 그 중심에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와 직지가 있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내년 벌써 10회를 맞이 하고, 직지는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는 나시장의 뚝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나시장이 올 상반기에 펴년 '세계문화도시의 꿈' 자서전을 보면 그 과정에는 곡절이 적지 않았다. 유네스코 프랑스위원회는 처음에는 직지의 소유국으로 유네스코 등재 작업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99년 2월 유네스코 프랑스위원회는 갑자기 "등재 의사가 없다"고 알려왔다. 당시 청주지역 일부 시민단체가 직지반환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이것이 유네스코 프랑스 위원회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자극하였다. 그해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4회 유네스코 기록유산 자문회의에서 직지는 의안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나시장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2001년 6월 제5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자문회의를 26개국 45명의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최초로 청주에서 개최하였더. 이때 직지는 기록물 소유국이 아닌
조선시대 수령(守令)은 국왕의 대리 통치자로, 그 이름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수령이 지방 임지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받는 것은 해당 고을의 인문과 자연지리가 담겨진 지도였다. 조선후기에는 방안식과 회화식 등 크게 2종류의 지도가 발달하였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잘 알려진 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에 비해 후자는 정확도가 다소 뒤떨어지나 고을 전체를 1쪽의 그림지도로 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회화식 지도를 그리는 데는 지방 화원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지도를 정확히 그리지는 못했으나, 실경 산수화에 익숙한 솜씨를 살려 고을 전체의 경관과 인문적 이미지를 잘 묘사하였다. 영동권 황간면 한천팔경을 찾으면 "이런 곳에 감입곡류(嵌入曲流)의 비경이 숨겨져 있다니"라며 놀라게 된다. 그러나 한천팔경은 조선시대~일제 강정기 고지도에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한천팔경을 묘사한 조선시대 고지도로는 (조선후기), (1872), (조선후기), (조선후기), (조선후기), (1923) 등이 있다. 이들 고지도가 한천팔경 8개 지명을 모두 표기한 것은 아니다. ···는 월류봉과 용연대, 는 월류봉과 사군봉, 는 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19세에 목은의 후예인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이후 25세까지 율곡의 문인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ㆍ《가례(家禮)》 등을 배웠고, 사계가 작고하자 그의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에게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전적으로 주자의 글을 읽으며 주자의 방식을 행동 양식으로 추종하였다. 같은 시기에 동문수학한 이로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李惟泰) 등이 있다. 우암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에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면서 관료로서의 첫발을 디뎠다. 우암은 2년 후인 29세(1635)에 뒷날 효종(孝宗)이 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어 학문을 강론하는 등 사적으로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런 우암은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낙향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여번이나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머문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신 우암은 중앙에 포진한 제자들은 통해 정국을 쥐락펴락 하였다. 우암은 병자호란(1636)의 발발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고 소현
한국 현대신문사를 논하려면 천관우(千寬宇, 1925~1991)와 송건호(宋建鎬, 1927~2001) 두 거목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은 각각 우리고장 제천시 청풍면과 옥천군 군북면 출신이고, 연령대도 비슷하다. 최근 제천시와 옥천군이 두 인물을 기념하는 사업을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옥천군은 얼마전 '청암 송건호 기념사업회'를 창립한데 이어 군북면 비야리 생거터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 제천시는 지난 11일 제천시청에서 백산학회(회장 하문식 세종대 교수)와 공동으로 '후석 천관우의 한국사 연구와 역사 인식'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과거의 영화가 그리운 청풍 고을에서 천관우 같은 언론 거목이자 대사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관우는 영양(潁陽) 천씨 군수공파 명선(命善, 1896~1955)의 아들로 청풍 북진(北津)에서 태어났다. 영양 천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였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 1543~·)로, 천관우는 그의 16세손이 된다. 그는 중국 지금의 사천성 천고봉(千古峰) 밑에 살았다 하여 성을 천씨로 삼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
한확(韓確 , 1403~1456)은 우리고장 청주가 관향으로, 태종~세조 등 4임금을 모셨다. 그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등 말 그대로 일생의 영달을 누렸다. 그 바탕에는 여말선초의 공녀(貢女) 제도가 있었다. 한확에게는 최소 2명의 누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가운데 손위누이는 태종대에 명나라 공녀로 진헌돼 영락제(명 태종)의 후비인 여비(麗妃)가 됐으나 영락제의 급서와 함께 순장을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확의 막내 여동생은 명나라 선덕제의 공녀로 간택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녀는 미색(美色)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고, 따라서 제 4차 공녀 때 한양도성을 떠나 명나라로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몸이 갑자기 아파 명나라 출발이 연기되었다. '처녀 한씨(韓氏)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에 따라 죽었으므로,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또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아뢰었으므로, 와서 뽑아 가게 되었는데, 병이 나게 되어(하략).'- 공녀가 된다는 것은 생이별을 의미한다. 나중에 이름이 한계란(韓桂蘭)으로 확인되는 한확의 막내 여동생도 이를 모
충주시 엄정면 백운산에는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전통사찰이 위치한다. 이 사찰은 보물 제 1527호인 '철조여래좌상'으로 유명하다. 대웅전에 봉안된 이 철불(鐵佛)은 원래 인근 억정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제작 시기는 나말여초이다. 백운암이 최근 들어 또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사찰의 창건주는 구한말 고종 때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진령군(眞靈君, 혹은 臻靈君) 이씨이다. 그녀는 국운이 다해가던 19세기말 충주지역의 무당이었다. 그녀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감곡과 노은면 등 충주지역으로 피난 왔을 때, 곧 환궁할 것임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현실이 됐고, 이에 감복한 명성황후는 그녀에게 진령군 여대감(女大監)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녀와 명성황후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궁궐로 불려 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관우(關羽)의 영정을 모시겠다고 황후를 설득, 아예 궁궐 안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고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다. 황현(黃玹, 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두 여자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현혹되어 서울로 불러들여 관제묘의 북쪽에 살도
우리 역사에 공녀(貢女)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후기다. 고려 원종은 무신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종은 그 과정에서 원의 힘을 빌렸고, 고려는 그 대가로 부마국이 되었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사위나라 고려에 대해 해동청(海東靑·매) 등 각종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다. 공물 목록에는 공녀(貢女)도 포함돼 있었고, 그것의 표면적인 이유는 원나라 병사 장가들기였다. 원나라를 무너트리고 중원의 패자가 된 명나라도 조선 전기까지 공녀를 요구했다. 조선은 영락제(永樂帝)을 시작으로 선덕제(宣德帝)까지 26년간 총 7차례에 걸쳐 1백여명의 공녀를 받쳐야 했다. 명나라의 제 3차 조선 공녀 요구는 1417년(조선 태종 17)에 있었고, 이때 2명의 10대 소녀가 선발되었다. 《태종실록》은 이에 대해 '중국에 진헌할 처녀를 가려 뽑게 하였더니, 황씨·한씨를 상등으로 삼았다. 황씨는 용모가 미려하니 고 부령 황하신의 딸이고, 한씨는 선연하니 고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이었다'라고 적었다. 이 가운데 황하신의 딸은 처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황제가 황씨의 처녀 아님을 힐문하니, 그제야 이르기를, "
중국과 바티칸 교황청이 머지 않아 수교를 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1783년(정조 7) 12월부터 40여일 동안 북경에 머무르면서 필담으로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이듬해 1월 북경교구 그라몽(Louis de Grammont)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당시 조선은 중국교구에 속해 있었다. 그는 1784년 귀국해 임의로 천주교 제도를 만들어 미사를 올렸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그 같은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그는 믿음이 깊은 윤유일(尹有一)을 보내 천주교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했다. 구베아 주교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책망했다. 이때부터 첫 영세자 이승훈을 중심으로 외국 성직자 영입운동이 일어났다. 구베아 주교는 이에 화답해 처음에는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인 밀사를 만나지 못하면서 조선 입국에 실패했다. 그 후속으로 선발된 인물이 조선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
속리산 법주사~세심정 구간에 '세조길'이 개설돼 방문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조는 1464년 2월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를 만나기 위해 속리산 복천암을 찾았다. 약간 다르지만 이때 거둥[擧動]한 길이 최근 개설된 세조길의 바탕이 됐다. 세조길은 평소의 등산로가 아닌, 법주사 수원지의 남쪽 사면으로 우회하고 있다. 『세조실록』은 당시 세조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福泉寺)에 쌀 300석, 노비 30구, 전지 200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2개 인용문에 등장한 지명은 보은현 동평(東平)·병풍송(屛風松)·속리사(俗離寺)'복천사(福泉寺) 등이다. 동평은 보은지역 동쪽에 있는 들[野,] 복천사는 지금의 복천암을 지칭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병풍송'은 '머물렀다', '행궁으로 돌아왔다'는 서술어가 뒤따르
신유박해 떼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배론의 토굴(土窟)로 피신, 이곳에서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였다. 이때 토굴 안의 황사영에게 신유박해의 참상과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인물이 김한빈(金漢彬, 1764-1801)이라고 전회에 밝혔다. 토굴의 사전적인 의미는 '땅을 파서 굴과 같이 만든 큰 구덩이'이다. 이런 토굴은 수평굴인 횡혈(橫穴)과 수직굴인 수혈(竪穴)로 나눠진다. 배론 토굴은 횡혈로 그리 깊지는 않다. 배론 토굴을 만드는 데는 김한빈보다 당시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金貴同, ·~1802)이라는 인물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귀동이 배론을 찾은 목적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측 기록을 수집·정리한 책으로 『사학징의(邪學懲義)』가 있다. 줄여서 '징의'라고도 부르는 이 책에는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직업 및 입신 동기, 신앙활동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사학징의』는 김귀동 자백 내용을 '저는 본디 고산(高山) 사람입니다. 제천(堤川)의 흙과 나무가 좋다는 말을 듣고 옹기를 구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려는 계획으로 올해 2월 초승에 배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수렴청정 기간 동안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대대로 노론 집안이었던 그녀(김한구 딸)는 집권 보수세력인 노론과 손을 잡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은 반대세력 남인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이 과정에서 남인계열이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약종(若鍾) 이 사형에 처해졌고 약전(若銓)은 흑산도,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됐다. 정약용가의 맏사위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약용 맏형인 약현(若鉉)의 딸 명련(命連)과 혼인했다. 그는 신유박해가 발생하자 제천 배론으로 피신, 신학당 뒤편의 토굴에 은거했다. 그는 이 토굴에서 신유박해 참상과 교회재건 방책 등의 내용이 담긴 '황사영 백서'를 써,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백서는 62×38㎝ 크기의 명주천으로, 그 위에 1만3천300여자의 한자를 적었다. 백서의 내용 중에는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
테레사 수녀가 가톨릭 성인(聖人, sanctus)의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한국 가톨릭 성인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103위가 성인의 반열에 올라있다. 가톨릭 교회법상 성인의 반열에 오르려면 물리적, 윤리적 기적(奇蹟, miraculum)을 행하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반열에 오른 103위는 기적 확인 과정을 생략하고 지난 1984년 복자에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로마 교황청은 목숨과 맞바꾼 신앙심 자체를 기적으로 판단하였다. 한국 가톨릭 103위 가운데 충북과 연고가 있는 인물의 한 분으로 장주기(張周基, 1803∼1866) 요셉이 있다. 수원이 고향인 장주기는 1820년대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의 배론으로 이주하였다. 1855년 그의 돈독한 신앙심은 자신의 집이 신학교로 사용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신학교는 이 같은 배경 아래 탄생하였다. 배론신학교의 초대 교장은 프랑스 파리 외방교회 소속의 푸르티에(Pourthie, 한국명 신요안, 1830-1866)로, 1855년 6월 중국 상해를 거쳐 바닷길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배론신학교의 교수직은 프랑스 출신의 또 다른 신부인 프티
충북 불교의 '큰집'인 법주사가 요즈음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법주사는 충북도의 요청을 수용, 관광진흥 차원에서 문화재관람료를 폐지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적 해탈을 위해 수행하는 것은 불교에서는 소승'(小乘), 널리 중생 구제를 목표로 하는 것은 대승(大乘)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법주사의 이번 결정은 대승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속리산 법주사는 국보와 보물급 유물을 많은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가운데 국보 제 64호 석연지(石蓮池)가 있다. 석연지의 겉면에는 활짝 핀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그리고 물그릇 모양의 내부는 많은 양의 물을 담수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그래서 석연지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체로 통일신라 때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연지 조각의 정수는 몸돌 겉면의 연꽃 문양이다. 겉면 하부에는 돌아가며 각 면마다 2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해 강한 질감으로 돋을새김 돼 있다. 그 위에는 연꽃 무늬 8개가 역시 돋을새김 되어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전통주택에서 볼 수 있는 난간 모습의 조형물이 올려져있다. 석연지의 용도와 관련하여 그 안에 물을 채우고 연꽃을 띄웠다는 설이 구전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이 흉(서가)할 경우 임시 관청인 실록청을 꾸려 선대 왕의 실록을 간행,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역대 왕의 실록 가운데 '지리지'의 체계까지 갖추고 있는 실록은 이 유일하다. 바로 이다. 세종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중앙집권 강화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세종은 지방의 현황을 속속들이 파악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지리지인 (新撰八道地理志)이다. 는 를 바탕으로, 누락된 내용까지 보완해 단종 2년(1454)에 완성되었다, 8권 분량의 는 고을마다 다소의 편차가 있지만 지방관의 인원, 연혁, 고을의 별호,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의 사방 경계, 호구(戶口)와 군정(軍丁)의 수, 성씨, 토질과 전결(田結), 특산물, 약재,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소 의외로 약재로 포함돼 있다. 세종은 애민(愛民) 정책의 일환으로 의료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진 의료문화로 수입한 중국 의약서 내용과 조선의 약초 이름·약효 등이 달라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의 노중례(盧重禮,?~1452)를 두 번이나 명
[충북일보] 부강지역은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됐지만, 근대기까지 청주 경제의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부강은 금강 물길의 내륙하항 종점으로 기능하였고, 이를 통해 서해의 각종 해산물과 소금이 청주지역으로 반입됐다. 그런 부강지역 사람들은 1백년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신영우(사학과) 충북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삶은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기 고종 정부는 세금부과를 정확히 하기 위해 측량작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그 성과물을 광무양안이라는 지대장부로 만들었다. 도 광무양안사업의 일종으로, 지난 1900년에 작성되었다. 지금의 부강지역은 문의군의 여러 면(面) 가운데 주로 '삼도면'(三道面)에 속해 있었다. 신교수는 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 집의 규모 △집의 종류 △지주(地主)의 분포도 등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주거상을 상당부분 복원하였다. 그는 "삼도면을 포함한 문의군의 집 규모는 2.5칸 정도인 것으로 분석됐다"며 "이는 같은 광무양안기의 충주지역 규모보다 다소 작은 수치"라고 밝혔다. 전통건축 개념의 '초가 3칸'은 부엌 1개에 방 2개가 딸린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2.5칸'
[충북일보] 돈이나 재물을 쓰는데 매우 인색을 사람을 가리켜 '자린고비'라고 한다. 그런 자린고비는 설화나 전래동화에 매우 다양한 행태로 등장한다. 먼저 '생선 매달고 쳐다보기'는 반찬값을 아끼려고 하는 행동이고, '파리 쫓아가기'는 파리 몸에 묻은 된장과 간장을 되찾으려는 동작이다. 또 '부채를 펴 들고 목을 움직이기'는 부채를 아끼려고 하는 모습이고, '생선 비늘 묻혀서 국끓이기' 역시 생선 살 돈을 아끼려고 하는 동작이다. 이밖에 '무장아찌를 아주 잘게 썰거나 통째로 상에 놓기'는 무장아찌를 먹지 못하게 하려는 모습이고, '엉덩이나 주먹으로 떡 찧기'는 절구와 절굿공이에 떡이 묻는 것이 아까워서 하는 행동이다. 이 가운데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생선 매달고 천장 쳐다보기'다. 몇 년전 TV 전파를 타면서 자린고비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국문학자들은 자린고비의 어원을 다소 다르고 풀고 있다. '겨른고비' → '저른고비' 혹은 '자른고비' →'자린고비' 순으로 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뒷말 '고비'는 한자 '죽은 아비 考(고)'와 '죽은 어미 비(女+比)에서 온 말로 본다. 그리고 앞말 '자린'은 제사나 차례
[충북일보] 충북대 박물관대학이 가을 학기를 앞두고 신선하면서 깊이 있는 강좌 내용을 마련하고 14주 동안 함께 할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특히 이번 박물관대학 과정은 지중해~프랑스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 남~중부 유럽 문화의 갈등을 한껏 풀어줄 것으로 보인다. 22일 충북대 박물관(관장 정찬문 교수)에 따르면 '박물관대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일반과정'과 다소 전문적인 내용이 소개되는 '심화과정' 등 이원으로 구성돼 있다. 올 가을학기 일반과정은 이번이 제 22기(9월 1일~12월 8일)로, '지중해 문화를 걷다'를 주제로 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오전) 개신문화관에서 실시되는 '일반과정'의 강의 주제와 강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문화(윤진 충북대교수) △영원한 도시, 이탈리아 로마(최혜영 전남대교수) △북아프리카-블루오션의 세계를 여행하다(이종화 명지대교수) △신비에 싸인 이집트 문명(유성환 서울대교수) △신과 인간, 고대 건축;그리스와 로마(최유종 충북대교수) △아랍, 아랍인, 이슬람-편견과 오해(윤용수 부산외대교수) 등이 마련돼 있다. 이어 △지중해의 왕자, 레반트문명(김성 협성대교수)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음악과
유교사회에서의 '삼강(三 綱)'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 등을 말한다. 임금을 섬기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며, 남편을 섬기는 것은 아내의 도리라는 뜻이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 집현전 학자 설순에게 하명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금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효자, 충신, 열녀를 모아서 책을 만들도록 했다. 바로 《삼강행실도》다. 《삼강행실도》는 그로부터 2년 후 효자, 충신, 열녀 각 1백10명씩 총 3백30명을 3권의 순한문 책으로 간행되었다. 1481년(성종 12)에는 언해, 즉 한글 번역도 이뤄졌다. 그러나 언해를 함에 따라 책 분량이 많아질 뿐 아니라, 널리 배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자 허침, 정석견 등이 성종 20년에 세종조의 《삼강행실도》를 바탕으로 하여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씩 총 105명으로 줄여 1권의 책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 인물은 총 16명으로, 전체 1백5명의 l6%를 차지한다. 《삼강행실도》에 지난 회에 소개한, 우리고장 충주와 청주의 지방관을 지낸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崔婁伯·?~1205)도 효자편에 등장한
[충북일보] 올 여름 충북지역의 이상 고온현상은 기상학적으로 몇 가지 이례적인 특이점을 보이고 있어, 기상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도시지역이 아닌 내륙 산간지역에서 한낮 기온이 연일 가장 높게 올라가고 있어, 이의 고착화 여부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본보는 8월 중순임에도 불구하고 고온현상이 장기화됨에 따라 기상청이 제공하는 '지역별 상세 관측자료(AWS)'를 통해 도내 32곳의 기상관측 자료를 분석했다. 분석 기간은 8월 1일부터 13일까지 총 13일이었다. 그 결과, 32곳의 관측지점 가운데 단양 영춘지역이 13일 동안 무려 8일)이나 '최고기온 최고값'(한낮 최고기온)이 가장 높게 올라간 것으로 나타났다. 단양 영춘지역은 △8월 2일 31.3도 △3일 34.4도 △5일 36.6도 △7일 36.7도 △10일 36.0도 △11일 37.0도 △12일 37.0도 △13일 36.8도를 기록, 8번이나 당일 도내에서 한낮 기온이 가장 높게 치솟았다. 13일 동안 도내에서 한낮 최고기온 횟수가 두 번째로 많이 올라간 지역은 청주시 문의면 신대리(청남대)로 △8월 9일 36.0도 △8일 35.9도 △6일 37.1도 △4일 35.2도 등 총
[충북일보] 15일이 광복 71주년인 가운데, 제 3대 이명구(李明求·1888~1977) 충북지사의 행적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오창면 백현리 태생의 이 전지사는 본래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전신)를 졸업한 전문 의료인으로, '청주 제 1호 의사'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또 그가 1921년 남문로 1가에 세운 '신명(新明) 의원' 역시 '청주 제 1호 개인 병원'으로 기억돼 왔다. 이밖에 그는 망선루 이전, 청주교 가설, 청주여중과 청주대 건립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등 근대기 청주지역에 있어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인물로 여겨졌다. 그의 이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은 지난 2002년 △조선총독부 참의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충북이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지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 708명의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의 (1970)에 등장하는 '전재(戰災)동포 구조사업'은 당시 다른 인물에서는 거의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를 친일파로 분류한 것과 사뭇 대비되고 있다. '전재동포'는 글자 그대로 자연재해가 아닌 전쟁으로 인해 재난을 당한 동포를 일컫고 있다. 1945년 8월
[충북일보] 고려와 조선시대의 장례문화는 크게 달랐다. 불교가 발달했던 고려시대에는 묘지명(墓地銘)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시대에는 묘비명(墓碑銘) 문화가 성행했다. 묘지명은 한 인물이 숨진 뒤 망자의 이름과 나이, 가계와 행적, 가족 및 장지(葬地)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한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묘비명은 그 내용과 형식은 묘지명과 같으나, 이를 새긴 비석을 무덤 입구에 세우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망자의 일대기를 사언(四言) 형식의 산문으로 압축한 명문 구성은 거의 같다. 고려시대 묘지명 문화가 유행한 것은 불교 화장풍습과 관련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망자의 화장한 뼈를 작은 석관에 담아 지하에 매장하는 장례가 유행했고, 이때 묘비명보다는 묘지명이 더 적합하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여성 이름이 유일하게 기록된 염경애(廉瓊愛) 묘지명이 있다. 1148년(의종 2)에 제작된 이 묘지명은 세로 30.3cm, 가로 69.7cm, 글자크기 1.2cm 등의 제원을 지니고 있다. 제작자는 염경애의 남편 최루백(崔婁伯·?~1205)이다. 그는 수주(水州·지금의 수원) 지역의 향리 최상저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시어사 등의 대
[충북일보]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 법 개정으로 지역 부흥 더불어민주당 이강일 후보는 법 개정에 무게를 뒀다. 이 후보는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상당구를 상당하게' 등 공약을 크게 2개 파트로 분류했다. 첫 번째 부분인 대한민국을 당당하게 공약에선 △판·검사 등 국가 공무원과 변호사를 분리 선발하는 시스템 마련 △검찰청의 기소청 전환 △검사의 특활비 축소 △저출생 정책 수립 추진 등을 제시했다. 이처럼 이 후보는 주로 사법시스템 개혁 방점을 찍었다. 대체로 현행 법을 개정해 잘못된 국가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것이 골자다. 공약 중에 또 눈에 띄는 부분은 SK하이닉스 지원 등 미래 산업 육성이다. 청주 지역경제의 한 축인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공정(M15, M17) 증설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공약이다. '상당구를 상당하게' 부문에는 지역경제 활성화, 일자리, 교육 등의 공약이 담겼다.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규제완화와 상업지역 공동주차구역 관리제를 도입하는 공약과 근로자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상조휴가법' 신설 등이 눈에 띈다. 또 △아동수당으로 월 20만원을 지급 △기업 대상 청년인력 유지지원금 혜택 부여 △다함께 돌봄센터 설치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청주의 한 경로당에서 노인을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60대가 검찰에 넘겨졌다. 청주상당경찰서는 특수협박·폭행 혐의로 A(61)씨를 구속 송치했다고 27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3일 오후 2시 30분께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한 경로당에서 노인 B(77)씨를 폭행하고 흉기로 위협한 혐의를 받는다. 그는 술을 마시고 경로당을 찾았다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당하자 "왜 나는 이용을 못 하냐"며 폭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계속해서 소란을 피우자, 경로당 안에 있던 B씨가 "왜 욕을 하냐"며 제지했고, 이에 격분한 A씨는 주먹으로 B씨를 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B씨가 폭행을 당한 뒤 112신고를 하자 흉기를 들고 "죽여버리겠다"며 난동을 부린 것으로도 파악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긴급 체포했다. / 임성민기자
[충북일보] "지역경제와 회원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차태환 청주상공회의소 회장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 지역 상공인 권익 향상을 위한 본연의 기능과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담담한 어조로 밝혔다. ◇청주상공회의소가 확산시킬 신(新)기업가 정신은. "기업의 역할에 있어서 사회적 가치 창출이 중요해졌다. 기업이 가진 혁신역량과 기술, 자본, 아이디어를 활용해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시대와 국민이 요구하는 기업의 새로운 역할에 부응하겠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들을 위한 쉼터버스 제작, 위기청소년 심리상담과 일자리 제공, 저출산 극복을 위한 돌봄환경 개선사업 등 기업의 다양한 사회공헌활동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아이디어가 비즈니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겠다." ◇지역내 소비 침체가 길어지고 있다. 촉진방안에 대한 구상이 있나. "소비 촉진을 위한 다양한 우리 지역의 행사에 저희들이 이제 적극적으로 동참해서 좀 도움을 드리거나 힘을 실어줄 수 있도록 하겠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소비 촉진 챌린지에 동참했다. 이같은 방향으로 청주상의에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