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황후가 된 우리고장 진천 출신 吳공녀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그 가운데 양무공파(襄武公派)에 속한다. 『보성오씨 양무공파 세보』 에 의하면 양무공파는 1세조 현필(賢弼)부터 9세 윤정(允貞)까지는 인명과 계보가 다소 불확실하다. 따라서 “구전 족보의 기록을 기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는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10세 현우(玄祐), 11세 용권(用權), 12세 맹손(孟孫), 13세 자경(子慶·오황후 고조), 14세 연순(延純·오황후 증조) 등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14세 연순은 찬(璨), 희(希), 집(執) 등 3형제(15세)를 뒀고 이 가운데 ‘집’이 오황후의 조부가 된다. 그는 슬하에 오황후의 친부인 오척을 비롯해 비(備)·엄(儼)·한(한人+閒)·부(傅)·전(佺) 등 6형제(16세)를 뒀다. 이 가운데 오척은 맹선(孟璿), 숙선(淑璿) 등 두 아들(17세)을 뒀고, 이들이 오황후와 오누이간이 된다. 비·엄·한·부·전 등 오황후의 삼촌에 해당하는 5형제는 모두 현감 이상의 품관에 오르는 등 입신출세하였다. 오비는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정5품)을 거쳐 통훈대부(정3품)에 올랐다. 오엄은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역임하
정유년 닭의 해가 시작됐다. 닭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대 중국의 진나라 진수가 쓴 『삼국지』이다. 그 가운데 한전조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出細尾鷄 其尾皆五尺餘’(출세미계 기미개오척여), 의역하면 ‘동이 즉, 한국에서는 가는 꼬리의 닭이 나오는데, 그 꼬리의 길이가 모두 5척 남짓하다’ 정도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가 쓰여진 원삼국시대에도 닭이 길러졌음을 알 수 있다. 닭은 우리나라 고전문학 작품 속에도 등장한다. 의 크라이막스는 아버지의 눈을 띄게 하기 위해, 심청이가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가는 대목이다. 그날 심청이는 이렇게 자탄했다. ‘닭아, 닭아, 우지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섧지 않으나 / 의지 없는 우리 부친, 어찌 잊고 가잔 말가.’ 닭과 과련된 우리말 중에는 잘못 쓰이고 있는 것도 있다. ‘영계’라는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을 뜻하는 속어인 영계를 영어 Yong과 한자 닭계 자의 결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영계는 우리말 단어 ‘연계’가 잘못 알려져 사용되는 경우다. 연계는 한자 ‘연할 연’(軟)자 와 닭계(鷄)자로, 연한 닭이라는 뜻이다. 연계의 반대
한확(韓確 , 1403~1456)은 청주가 관향으로, 태종~세조 등 4임금을 모셨다. 그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등 영달을 누렸다. 그 바탕에는 여말선초의 공녀(貢女) 제도가 있었다. 그는 누이에 이어 막내 여동생(한계란)을 명궁에 공녀로 전헌하였다.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하고, 칼로 제 침구(寢具)를 찢고 갈마 두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흩어 주니, 침구는 장래 시집갈 때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이었다.’- 한양도성 안 사람들은 한계란의 그런 명궁행을 ‘생송장’이라고 부르며 슬퍼하였다. ‘도성 안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하였다.’- 조선 조정은 공녀 간택에 대한 대가로 친권자인 친부에게 승진의 혜택을 줬다. 우리고장 진천 사람이면서 자신의 딸을 명궁에 공녀로 진헌한 오척(吳倜)도
고려 원종은 무신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원종은 그 과정에서 여원(麗元) 연합군의 힘을 빌렸고, 고려는 그 대가로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원나라는 이때부터 사위나라 고려에 대해 공녀(貢女) 등 각종 공물을 요구하였다. 고려 공녀의 표면적 구실은 몽고가 전쟁 수행 중에 획득한 수십 만 명의 포로병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준다는 일종의 위무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려 여자에 대한 야욕 충족과 반몽 의지를 무기력하게 하려는 고등술책이 숨어 있었다. 1275년(충렬왕 1) 10인의 처녀를 보낸 것을 시초로, 공민왕 초기까지 80여 년 동안 수많은 고려의 여자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공녀에 따른 폐단은 매우 대단, 충렬왕은 나라 안의 혼인을 금하기도 하였다. 또 1287년 좋은 집안의 처녀들은 먼저 관에 보고한 뒤에야 시집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공녀는 주로 13~16세의 처녀를 대상으로 하였다. 금혼령의 여파로 당시 고려에는 열 살이 되면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머리를 깎아 중이 되기도 하고, 억울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동녀(童女)의 수는 많게는 40~50명에 이르
역대 민선 청주시장 가운데 나기정(羅基正) 시장은 유독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문화시장'을 자임하였고, 그 중심에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와 직지가 있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는 내년 벌써 10회를 맞이 하고, 직지는 지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는 나시장의 뚝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나시장이 올 상반기에 펴년 '세계문화도시의 꿈' 자서전을 보면 그 과정에는 곡절이 적지 않았다. 유네스코 프랑스위원회는 처음에는 직지의 소유국으로 유네스코 등재 작업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99년 2월 유네스코 프랑스위원회는 갑자기 "등재 의사가 없다"고 알려왔다. 당시 청주지역 일부 시민단체가 직지반환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이것이 유네스코 프랑스 위원회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자극하였다. 그해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4회 유네스코 기록유산 자문회의에서 직지는 의안으로 상정되지 못했다. 나시장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2001년 6월 제5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자문회의를 26개국 45명의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최초로 청주에서 개최하였더. 이때 직지는 기록물 소유국이 아닌
조선시대 수령(守令)은 국왕의 대리 통치자로, 그 이름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수령이 지방 임지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받는 것은 해당 고을의 인문과 자연지리가 담겨진 지도였다. 조선후기에는 방안식과 회화식 등 크게 2종류의 지도가 발달하였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잘 알려진 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에 비해 후자는 정확도가 다소 뒤떨어지나 고을 전체를 1쪽의 그림지도로 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회화식 지도를 그리는 데는 지방 화원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지도를 정확히 그리지는 못했으나, 실경 산수화에 익숙한 솜씨를 살려 고을 전체의 경관과 인문적 이미지를 잘 묘사하였다. 영동권 황간면 한천팔경을 찾으면 "이런 곳에 감입곡류(嵌入曲流)의 비경이 숨겨져 있다니"라며 놀라게 된다. 그러나 한천팔경은 조선시대~일제 강정기 고지도에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한천팔경을 묘사한 조선시대 고지도로는 (조선후기), (1872), (조선후기), (조선후기), (조선후기), (1923) 등이 있다. 이들 고지도가 한천팔경 8개 지명을 모두 표기한 것은 아니다. ···는 월류봉과 용연대, 는 월류봉과 사군봉, 는 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19세에 목은의 후예인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이후 25세까지 율곡의 문인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ㆍ《가례(家禮)》 등을 배웠고, 사계가 작고하자 그의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에게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전적으로 주자의 글을 읽으며 주자의 방식을 행동 양식으로 추종하였다. 같은 시기에 동문수학한 이로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李惟泰) 등이 있다. 우암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에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면서 관료로서의 첫발을 디뎠다. 우암은 2년 후인 29세(1635)에 뒷날 효종(孝宗)이 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어 학문을 강론하는 등 사적으로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런 우암은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여러 번 낙향을 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여번이나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머문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신 우암은 중앙에 포진한 제자들은 통해 정국을 쥐락펴락 하였다. 우암은 병자호란(1636)의 발발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고 소현
한국 현대신문사를 논하려면 천관우(千寬宇, 1925~1991)와 송건호(宋建鎬, 1927~2001) 두 거목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은 각각 우리고장 제천시 청풍면과 옥천군 군북면 출신이고, 연령대도 비슷하다. 최근 제천시와 옥천군이 두 인물을 기념하는 사업을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옥천군은 얼마전 '청암 송건호 기념사업회'를 창립한데 이어 군북면 비야리 생거터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 제천시는 지난 11일 제천시청에서 백산학회(회장 하문식 세종대 교수)와 공동으로 '후석 천관우의 한국사 연구와 역사 인식'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과거의 영화가 그리운 청풍 고을에서 천관우 같은 언론 거목이자 대사학자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천관우는 영양(潁陽) 천씨 군수공파 명선(命善, 1896~1955)의 아들로 청풍 북진(北津)에서 태어났다. 영양 천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하였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千萬里, 1543~·)로, 천관우는 그의 16세손이 된다. 그는 중국 지금의 사천성 천고봉(千古峰) 밑에 살았다 하여 성을 천씨로 삼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여
한확(韓確 , 1403~1456)은 우리고장 청주가 관향으로, 태종~세조 등 4임금을 모셨다. 그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등 말 그대로 일생의 영달을 누렸다. 그 바탕에는 여말선초의 공녀(貢女) 제도가 있었다. 한확에게는 최소 2명의 누이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가운데 손위누이는 태종대에 명나라 공녀로 진헌돼 영락제(명 태종)의 후비인 여비(麗妃)가 됐으나 영락제의 급서와 함께 순장을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확의 막내 여동생은 명나라 선덕제의 공녀로 간택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녀는 미색(美色) 뛰어난 것으로 소문이 나있었고, 따라서 제 4차 공녀 때 한양도성을 떠나 명나라로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몸이 갑자기 아파 명나라 출발이 연기되었다. '처녀 한씨(韓氏)는 한영정의 막내딸이다.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에 따라 죽었으므로,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또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아뢰었으므로, 와서 뽑아 가게 되었는데, 병이 나게 되어(하략).'- 공녀가 된다는 것은 생이별을 의미한다. 나중에 이름이 한계란(韓桂蘭)으로 확인되는 한확의 막내 여동생도 이를 모
충주시 엄정면 백운산에는 백운암(白雲庵)이라는 전통사찰이 위치한다. 이 사찰은 보물 제 1527호인 '철조여래좌상'으로 유명하다. 대웅전에 봉안된 이 철불(鐵佛)은 원래 인근 억정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고, 제작 시기는 나말여초이다. 백운암이 최근 들어 또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사찰의 창건주는 구한말 고종 때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진령군(眞靈君, 혹은 臻靈君) 이씨이다. 그녀는 국운이 다해가던 19세기말 충주지역의 무당이었다. 그녀는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감곡과 노은면 등 충주지역으로 피난 왔을 때, 곧 환궁할 것임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현실이 됐고, 이에 감복한 명성황후는 그녀에게 진령군 여대감(女大監)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녀와 명성황후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궁궐로 불려 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관우(關羽)의 영정을 모시겠다고 황후를 설득, 아예 궁궐 안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고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다. 황현(黃玹, 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두 여자의 관계를 이렇게 적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현혹되어 서울로 불러들여 관제묘의 북쪽에 살도
[충북일보] 청주 운천동의 한적한 골목, 주택을 개조한 가게가 있다. 정겨운 외관을 따라 들어가면 널찍하지만 아늑한 내부가 손님을 반긴다. 나무 책상과 의자, 마룻바닥에서 따뜻한 익숙함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교실을 생각하며 인테리어한 박성수 대표의 의도다. 옛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밟고 뛰놀던 마루를 뜯어와 바닥으로 활용했다. 자잘하게 남아있는 흠집 사이로 아이들의 행복했던 시간이 전달되는 듯하다. 곳곳에 놓인 초록 식물도 분위기를 더한다.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한 박성수 대표는 은퇴를 5년여 앞두고 그간 계획했던 인생 2막의 시작을 앞당겼다. 인생의 두 번째 칸에 일본식 라멘이 들어온 것은 특별한 계기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흐름이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딸 덕에 자주 접한 음식이기도 했고 아내의 지인이 라멘의 대가인 것도 자연스러웠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출퇴근하며 기술을 배우고 자기 생각을 반영해 맛의 변주가 가능할 만큼 확신하게 된 뒤 수라멘을 열었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영업하는 수라멘은 그 외의 시간에도 열기가 새어 나온다. 심지어 휴일인 월요일에도 불 켜져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국물부터 소스, 면까지 모두 손수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 오창이 다목적 방사광가속기가 중심이 된 세계적인 첨단 과학기술 메카로 육성될 전망이다. 충북도는 이 분야가 도약할 수 있는 핵심 기반이 될 '싱크로트론 밸리' 조성 사업을 대선 공약에 반영해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21일 도에 따르면 '오창 K-싱크로트론(가속기) 밸리'는 방사광가속기가 구축되는 일원에 조성할 계획이다. 밸리 조성은 국내 기초과학 연구와 산업화의 글로벌 게임체인저가 될 가속기의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방사광가속기와 연계해 충북 전략 산업인 이차전지·반도체·바이오산업의 인프라 확충과 의생명·양자·인공지능(AI) 분야의 기반을 구축해 상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목적도 있다. 도는 방사광가속기가 들어서는 오창테크노폴리스 일반산업단지(199만5천937㎡) 내 42만8천㎡ 규모로 K-싱크로트론 밸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총사업비는 국비를 포함해 8천500억 원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된다. 도는 이 사업을 대선 공약에 반영한 뒤 내년 정부예산을 통해 사업비를 확보해 추진할 방침이다. 완공은 방사광가속기 구축 완료 후 1년이 지난 후인 오는 2030년이다. K-싱크로트론 밸리는 싱크로메디텍 콤플렉스와 글로벌 양
[충북일보] 김동연 경기지사는 "'당당한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고 싶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기울어진 경선 룰을 확정했지만 국민과 당원만 바라보고 당당히 경쟁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아닌 '어대국'(어차피 대통령은 국민)을 강조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국회·입법·사법부를 세종·충청으로 이전하고 대통령 임기 단축의 지방분권형 개헌과 50조 슈퍼 추경을 통해 국민통합을 이뤄야 한다고도 했다. ◇6·3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지금 국민들이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경제'와 '통합'이라고 생각한다. 민생경제의 위기에 더해 정치권에서 촉발된 분열과 적대의 골은 점차 깊어지고 있다. 내란과 탄핵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다.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정책과 확고한 비전, 실행력으로 경제위기 속에서 중심을 잡고 재도약을 이룰 리더십이 절실하다. 국민통합을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필수다. 다음 대통령은 임기 단축이라는 희생을 결단하고, 동시에 일관된 비전과 정책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해 국민통합의 마중물이 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문을 열어야 한다." ◇김동연 후보의 강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