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청주시의 새로운 상징물(CI)를 둘러싸고 청주시와 시의회, 시의회 여야간, 여기에 시민단체까지 가세하면서 다자간 갈등 양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승훈 청주시장이 최근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갈등이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 청주시의 새로운 상징물은 볍씨를 연상케 하고 있다. 청주시도 얼마전 "소로리 볍씨와 청원생명쌀 등을 '생명의 씨앗'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난 1988년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굴된 소로리 볍씨는 학문적으로 몇 가지 쟁점을 뛰어넘어야 할 과제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현재 소로리 볍씨는 대략 1만5천~1만3천년의 연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논점은 과연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 좁게는 청주 소로리에 과연 벼 생육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느냐는 점이다. 지질·기후 학자들에 의하면 대략 현생인류인 호모종이 출현한 이래로 지구상에는 4번의 빙하기가 찾아왔고, 1만5천~1만3천년 전은 마지막 빙하기(뷔름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는 시기였다. 기후학상 뷔름기는 대략 5만~1만전까지를 의미하고, 따라서 당시 지구기후는 극한, 한냉, 온냉, 온난 중 한냉으로 분류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벼는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16. 권용일 권용일(權用佾, 1884~19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한말 의병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07년 호좌의진을 계승한 이강년 부대에 투신하였고, 제천 천남전투 이래 충주, 문경, 영월, 안동 등지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의병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일년 남짓이지만, 그의 대담함과 불굴의 투지는 후기의병사에서 단연 빛난다.어려서 충(忠)·효(孝)·열(烈)을 마음에 새기다 권용일은 충청북도 청풍군 원서면 덕곡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에서 권태인(權泰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세 함(瑊)을 중시조로 삼는 안동권씨 화천군파로, 17세기 초부터 제천에서 세거해왔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형인 용연(用淵)은 농업으로 가사를 돌봤는데, 둘째였던 그는 11세가 되던 해에 서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은 대내외로 큰 위기상황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갑오개혁을 통해 한국의 내정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 한국에 대한 침탈을 가속화하였다. 이에 대한 한민족의 반일 감정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 봉
[충북일보] 6일이 금년 현충일인 가운데 전국 대부분의 충혼탑이 조선시대 사직단 자리에 서있고, 또 6월 6일로 정한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은 지난 1956년 4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거해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했고, 이후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던 자리에 충혼탑이 대대적으로 건립됐다. 앞서 일제는 청주의 경우 서공원(현 충혼탑 자리)에 청일·러일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일본인 오쿠마온보(大雄春峰)가 1923년에 쓴『청주연혁지』는 서공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櫻井 장군도 이에 동조하여 재향군인들과 도모하여 그곳에다 청일·러일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의 기념비를 세웠다.' 문제는 조선시대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와 곡식신에 대한 제사공간으로 사자(死者)와는 무관했었다는 점이다. 사직의 社는 토지, 稷은 곡식의 신만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 전쟁이서 죽은 사람이나 억울하게 죽은 이 등에 대한 제사 공간은 '여단'이라고 불렀고 이때의 제사를 '여제'라고 칭했다. 죽어서 가는 곳이 '북망산천'이라는 설에 따라 주로 고을의 북쪽에 위치했다. 청주의 경
[충북일보] 정황상 의병들의 반격은 1차 전투에서 패한 그날 야간에 준비를 해 다음날 새벽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1728년 3월 23일과 24일 사이다. 장담의 조카 경수(景洙)는 순직한 삼촌을 대신해 청안읍치 인근 마을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장담의 조카 경수로 하여금 연명겸의 집으로 가게하여 사청리(射廳里)와 상용문리(上龍門里), 용문리(龍門里)와 내외룡동(內回龍洞), 외회룡동(外回龍洞)에서 고르게 선발하게 하고 출신(出身)인 閔道昌과 더불어 거느리고 오게 했다.'- 전통용어 '출신'은 과거에 합격을 했으나 아직 임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후 경수는 매박리(梅朴里)로 가서 종질인 장태화(張太和), 조강동(釣江洞)으로 가서 권대열(權大悅)을 규합하는 등 60여명의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 인용문에 등장한 마을이름(里)은 '1872년 청안현지도'에서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청안현에는 읍내면, 북면, 남면, 동면, 서면, 근서면 등 6개 면이 존재했다. 이중 사청리는 근서면, 매박리, 회용동, 조강동 등은 읍내면에 위치했다. 근서면은 지금의 증평일대, 읍내면은 청안면 읍내리에 해당하고 있다. 의병들은 청안현청 가까이 접근해 북
1728년 3월 23일. 장담((張潭·?-1728)이 이끄는 청안현 의병들은 무신란 반군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들어갔다. 당시 반란군은 청안현청에 주둔하고 있었고, 무리는 가짜현감 정중익(鄭重益)이 이끌고 있었다. 선두에 서기를 자처했던 장담은 제일 먼저 청안현의 옥(獄)을 공격했다. '우리형이 먼저 달려가 옥에 이르러 옥문을 부수고 重益에게 잡혀간 한시익을 급히 구출했으나, 이로 인하여 적과 더불어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 저들은 숫자가 많고 우리는 적었으며, 강약이 매우 달랐다.'- '칼날이 서로 마주치게 됐는데'라는 표현에서 보듯 의병과 반군들은 육박전을 하듯 직접 격돌했다. 그러나 전세는 숫자가 적은 의병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의병은 중과부적의 상태에 놓였다. 중과부적은 '적은 사람으로는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위지〉(魏志) 에 나오는 표현이다. 전국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을 역설하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결국 이날 전투에서 의병장 장담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반
[충북일보] 충북도민들에게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공공건물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충북도청이다. 이를 풍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할까. 풍수상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봐야하는 것은 생룡인가, 아닌가 여부이다. 이때의 생룡은 용맥(龍脈)이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 생룡 판정을 받으려면 용맥이 좌우와 상하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좌우변화는 용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몸통을 좌우로 흔드는 모습으로, 그 각은 너무 크거나 작지 않은 30도 정도가 좋다. 상하변화는 용맥이 위로 솟구치거나 아래 로 급하게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낮아지는 곳에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고개이다. 풍수상 생룡상의 고개는 달리 과협(過峽), 또는 벌의 허리를 닮았다고 해서 봉요(蜂腰)라고 부른다. 생룡 판정을 받은 것중 이같은 변화가 가장 강하게 약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용은 강룡(强龍)이라고 일컫는다. 거시적 관점으로 본 충북도청의 풍수상 출발점은 속리산이다. 여기서 출발한 한남금북정맥은 회유치(回踰峙·보은~문경)에서 90도 회전하여 서쪽으로 나아가 피반령에 다다른다. 이후 피반령에서 청주의 동부를 북서쪽으로 가르면서 올라가 청주의 진산인 상당산에 이르고 있다. 이후
김상태(1862~1911)는 1896년 전기의병에 참여한 이래 후기의병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까지 항쟁을 지속한 불굴의 투사이다. 그는 소백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으로 불렸던 불사조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한말에 수많은 의병이 있었으나, 전기부터 후기까지 전 과정을 참여한 의병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그의 의병항쟁은 구한말 의병을 실체적으로 실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다 김상태는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당시는 영춘군 남천리)에서 아버지 김규병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삼척이고, 본명은 상호(相鎬)인데, 자(字)로 사용했던 상태(尙台)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어릴 때 영춘을 떠나 삼척 김씨들의 본향인 강원도 영월의 옥동마을로 이주하였다. 김상태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실력이 출중하여 마을에 서당을 열어 학동을 지도하는 한편, 향교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 형성에는 동학사상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옥동마을은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이 일시 숨어 지내며 포교활동을 하던 곳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옥동마을은 일찍부터
[충북일보] "그대들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짜 청안현감 鄭重益의 반군에 가담한 임필현(林必玄)이 한 이 말은 당시 기층민들의 정서를 대변한 말이었다. 토역일기 상으로 확인되는 반군 인물은 명현(命賢), 석창(碩昌), 몽엽(夢燁), 금립(今立), 시세(時世), 시만(時萬), 세강(世强), 반리(伴里), 임필현, 신평(信平), 차동(次同), 흥석(興石), 귀현(貴玄), 비억(非億), 명이(命伊), 성좌(性佐), 명이(明伊), 막남(莫男) 등 모두 18명이다. 이중 시세, 시강은 형제간이나 가까운 혈족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차동, 흥석, 귀현 등은 당시 청안현의 관노였다. 나머지는 신분을 알 수 없으나 느낌상 막동, 몽엽 등도 관노로 보여지고 있다. 각사등록, 영조무신별등록 등 1728년 무신란을 기록한 다른 기록에는 雄伊, 京元 등의 관노 이름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무신년 반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하층민으로 '부역을 제외시켜주고 부역을 삭감시켜준다'는 꾀임에 빠져 참여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난역의 일로 말하면 군사를 모으는 적장이 반드시 신역을 면제하거나 신역을 줄여 준다고 말하므로
이인좌가 파견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1728)이 청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감의 인부(印符)를 빼앗는 것이었다. 인부는 관인(官印)과 병부(兵符)의 준 말로, 임금의 신임장과 동일시 됐다. 관인은 말 그대로 관에서 찍는 도장을 의미하나, 병부는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지방관이 군대를 움직일 때면 임금의 교서와 함께 반드시 부절(符節)의 일종인 병부를 맞춰봤다. 부절은 대나무나 옥 따위로 만든 신표로 하나는 조정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지방관에게 주어, 군대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두 조각을 맞춰봤다. 이처럼 조선 정부가 병부제를 운영한 것은 군대가 반란군으로 돌변할 가능성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5.16 등 근현대의 모든 쿠데타는 군대가 국가권력의 통제권을 벗어나면서 성공했다. 1728년 3월 19일.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인부를 빼앗기 위해 부하 금립(今立), 시세(時世) 등을 진짜 청안현감 이정열(李廷說·?-1728)이 숨어있는 곳으로 보냈다. '19일 사렴이 今立, 時世 등이 고을 원이 印符를 탈취하기 위해, 시각을 정해서 보냈다. 두 역적이 고을 원이 피해서 숨을있는 곳에 가까이 도착하여 검을 빼들고 곧다로 들어가서
[충북일보] 전국 사찰의 문화재 징수와 관련해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의 징수 근거가 되는 문화재 보호법 제49조는 위헌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임락균 씨의 '문화재 관람료 관련 갈등에 대한 법적 검토' 논문에 의하면 현행 문화재 보호법은 지난 1962년 1월 '문화재관람료의 금액은 문교부장관이 인가한다'는 내용을 제정한 이래 여러 번의 개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1년 7월에 개정된 현행 문화재 보호법 제 49조 1항은 '국가지정 문화재의 소유자 또는 보유자는 그 문화재를 공개하는 경우 관람자로부터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다. 다만, 관리단체가 지정된 경우에는 관리단체가 징수자가 된다'라고 돼 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문화재관람료는 수익자 부담금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수익자 부담금은 '어떤 공익사업으로부터 특별한 이익을 받은 자에 대하여 그가 받은 특별한 이익의 범위 안에서 당해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시키는 것'으로, 문화재 관람료 징수에 따른 법리적 근거가 되고 있다. 임씨는 그러나 문화재 관람료 징수 행위는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행정작용에 해당하므로 '법률유보 원칙'과 '포괄위임 금지원칙'의
[충북일보] 무신란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鄭重益)은 실록에 칼을 잘 다뤘던 인물로 표현돼 있다. 다음은 이인좌가 경기도 죽산전투에서 관군에 사로잡힌 후 진술한 내용의 일부이다. '모의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과 정중복·정중익 등 형제이며….'- 청주읍성이 이인좌의 반란군에 점령당할 당시 진짜 청안현감으로 있던 인물은 이정열(李廷說·?-1728)이었다. 그는 반란군이 진격해 오자 관청을 버리고 도주하여 산골짜기에 숨었으나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때가 청주읍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간지 이틀 후인 3월 17일로, 원문은 이렇게 적혀 있다. 聚會軍卒 太半不至: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태반이 오지 않았다. 勢難守成 姑避其禍: (이정열은) 성(관청)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잠시 동안 그 화를 피하고자 했다. 仍卽棄官而走 鼠伏山谷: 인하여 관청을 버리고 달아나 산곡에 깃들어 납작 숨었다. 官屬無一人從之者: 관 벼슬아치 중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한 마디로 청안현 읍치는 무주공산으로 변했고, 이런 가운데서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이 3월 18일 부임했다. '18일 오시에
[충북일보]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
구석기인들이 동굴을 주거공간으로 사용한 반면, 고조선인들은 무덤공간으로 많이 활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만주~한반도 북부의 고조선 동굴무덤에는 집돼지뼈가 거의 대부분의 무덤에서 출토, 이 시기들어 돼지가 완전히 가축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충북대 출신의 세종대학교 하문식(역사학과) 교수가 얼마전 논문을 《백산학보》 제 98호를 통해 발표했다. 그는 고조선의 동굴 무덤문화를 규명하기 위해 △중국 태자하 유역(라오닝성 신빈~본계) △북한 미송리 유적(압록강 유역) △덕천 승리산유적((대동강 유역) △무산 지초리유적(두만강 유역) 등 1백40여기의 동굴무덤을 여러 해에 걸쳐 현장 조사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그 결과, 그동안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유의미한 내용들이 다수 확인됐다. 먼저 이들 무덤은 거의 공통적으로 △샛강 산자락의 석회암 동굴에 위치했고 △무덤양식은 무덤방이 아닌 낮은 구덩이를 파고 묻는 널무덤 형식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관련 동굴무덤에서 27종의 둥물뼈가 수습된 가운데 집돼지뼈 10곳, 개와 사슴뼈 8곳, 노루뼈 6곳, 닭 및 멧돼지뼈 5곳 등의 분포도를 보여, 집돼지뼈가 가장 많이 수습됐다. 그는 이에 대해 "이같은 자료는 돼지가 고조
[충북일보] 민강(閔橿, 1883~1931)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대동단(大同團)에 참여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더불어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이 때 민강은 동화약방(同化藥房)의 창업자이자 초대 사장으로서,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로서 활동하였고, 동화약방은 그 거점이 되었다. 민강을 독립운동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동화약품(전, 동화약방)의 '부채표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민강은 1883년 충북 청원군 양촌리(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민병호는 1882년 폐지된 선전관청의 선전관이었다. 그는 궁궐에 드나들며 평소 친분 있게 지낸 전의에게 궁중 비방을 전해 듣고, 그 비방에다 양약의 장점을 가미하여 활명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장남인 민강과 함께 동화약방을 창업하였다. 구한말 민강은 국운이 기울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화약방 내에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그는 교사에게는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육의 기회조차 얻기 어
[충북일보] 민원보(閔元普), 민덕효(閔德孝), 민백효(閔百孝), 민복효(閔復孝), 민득효(閔得孝), 민관효(閔觀孝),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1728년 무신란에는 충주목의 남인계열 사족들이 다수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여흥민씨와 그 인척들이 유독 많았다. '김덕유는 충추 사람으로 민암의 사위이고 한세홍의 내구(內舅) 이다. 처음에 민백효에 의해 인좌(引坐)되었으므로 체포해 추문하다가 곧 작처(酌處)했던 것인데, '김덕유가 법망에서 빠져나갔다.'고 충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였으므로….'- 이런 여흥민씨 중에는 '효'자 돌림이 다수를 차지했다. 다음 인용문은 그중 민원보의 항렬이 높고, '효'자 돌림은 그 아래임을 보여준다. "충주목에서 보고하여 온 바에 의하면, 역적 민원보의 아들 민복효·민득효는 연좌시켜 교형에 처하였고 어미 이녀(李女)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율문에 '부인의 나이 60세이거나 폐질(廢疾)을 앓는 사람은 논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민원보는 무신란 충주지역 주모자로, 연좌제에 의해 두 아들이 교형에 처해졌고 다만 어미만 고령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했다. 《영조실록》에 민원보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충주지역 인물은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충북일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욕돌역(褥突驛)은 과연 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 일대일까. 충주시민연합은 얼마전 보도자료를 내고 △문무왕이 충주 순행 중에 머무른 욕돌역에 문화공원을 조성할 것 △문무왕을 감동시킨 능안(能晏)의 가야무 전승할 것 △그리고 우륵국악단의 전통 고증에 따른 내실화 등을 요구했다. 이와 관련해 충주시민연합은 욕돌역의 공간적인 위치가 지금의 충주시 신니면 용원초등학교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이 단체의 주장대로 삼국사기에는 욕돌역이 분명히 등장한다. 다음은 그에 대한 번역문이다. '25일, 임금이 귀국하던 길에 욕돌역(褥突驛)에 머물렀는데, 국원(國原)의 관리인 대아찬 용장이 사사로이 잔치를 열어 임금과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 긴주(緊周)의 아들인 15살 소년 능안(能晏)이 가야의 춤을 추었다. 임금이 그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앞으로 불러 등을 두드려주며 금술잔으로 술을 권하고 폐백(幣帛)을 자못 후하게 주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원문을 옮기면 '二十五日 王還國 次褥突驛 國原仕臣龍長大阿飡 私設筵 饗王及諸侍從 及樂作 奈麻緊周子能晏 年十五歲 呈加耶之舞 王見容儀端麗 召前撫背 以金盞勸酒 賜幣帛
[충북일보] 5월 23일△이용민(충청일보 기자)·조윤경(아시아경제신문 기자)씨 결혼=23일(토) 낮 12시 청주 상당구 문의면 청남대.△박걸순(충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씨 자혼=23일(토) 오전 10시 30분 발리웨딩 컨벤션센터2층 펠리체홀.△노재관(충북도농업기술원 친환경연구과 식품개발팀장)씨 자혼=23일(토) 오후 2시 CJB 웨딩컨벤션 3층 신의 정원△윤태(전 충북도농업기술원 연구개발부장)씨 자혼=23일(토) 오후 1시 청주시 흥덕구 복대교회 본당△이경이(청주시 강서보건지소 주무관)씨 결혼=23일(토) 오후 2시30분 발리웨딩홀 2층 펠리체홀△정창헌(전 청주시 영운동장)씨 자혼=23일(토) 오후 2시30분 발리웨딩컨벤션 2층 펠리체홀△강혜진(옥천군 옥천읍)씨 결혼=23일(토) 낮 12시 옥천명가하우스웨딩홀 2층 △배유미(서원구 수곡2동 주민센터)씨 결혼=23일(토) 오후 1시 청주 마리앙스웨딩컨벤션 마리아쥬홀5월 24일△한대수(충주시 농업정책국장)씨 여혼=24일 낮12시 충주시 금릉동 파라다이스웨딩홀2층 피렌체홀(010-3412-9972)
채찬(蔡燦, ?~1924)은 한말 의병 출신으로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남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백서농장의 농감(農監)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장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명으로 백광운(白狂雲)을 사용하였는데, 따라서 당시 '백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졌다.◇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채찬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고,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군으로 투신하기 위해 남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구한말 국내의 의병이 망국 후 만주 독립군으로 전환한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간도지역에는 1911년 유하현을 중심으로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과 군사훈련을 할 수
[충북일보] 환국(換局)은 정권이 급작스럽게 교체되는 국면을 의미한다. 조선 숙종대에 이같은 환국이 경신, 기사, 갑신년에 3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서인과 남인이 정권을 주고 받았다. 숙종은 경신환국으로 남인, 기사환국으로는 서인, 그리고 갑술환국으로는 다시 남인을 몰아냈다. 결국 서인이 최종 승자가 됐고, 서인은 그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됐다. 환국의 소용돌이에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기사환국(1689)으로 전라도 정읍에서 먼저 사약을 받았지만 남인의 영수 민암(閔墨+音·1636-1693) 역시 갑술환국(1694)으로 유배지 제주도에서 사사됐다. 민암의 동생이 민희(閔熙·1614-1687)이고, 그 또한 형과 같은 남인의 당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환국의 소용돌이 과정에서 남해안의 궁벽한 곳으로 유배돼 끝내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멀리 귀양간 죄인 민희가 순천의 배소에서 죽었다. 민희는 탐오하고 방탕하며 용렬하고 고루하므로 세상에서 비루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었는데, 나이가 74세이었다.'- 1728년 일어난 무신란과 관련해 청주지역만 많이 부각돼 있으나 우리고장 충주지역의 호응도 무척 강했고, 이를 이끈 인물이 민희의 손자인 민원
[충북일보] 경종의 급서하고 그의 배다른 동생인 영조가 즉위하자 전국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이들 대부분은 영조에 호감을 갖지 않은 세력인 소론과 남인계열의 당색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중에는 권서봉(權瑞鳳·?-1728)이라는 인물로 있었고, 그는 이 상소로 인해 유배를 가야 했다. '임금이 오두석과 이삼령 등의 상소를 읽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흉악하고 참혹하다. 저 무리들의 흉악한 상소가 어찌 모두 자기 마음에서 나왔겠는가. 국문할 필요가 없다. 이덕배·오두석·이삼령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이덕표·권서봉(權瑞鳳)·최선·정전·이가운은 먼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권서봉의 유배생활을 그리 길지 않아, 무신란 1년 전인 영조 3년(1727)에 해배됐다. '을사년 이후 이명의는 북변으로 귀양가 있었고 권서봉도 또한 근읍(近邑)으로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에 이르러 이명의는 호남으로 이배(移配)되었고 권서봉도 잇따라 방한(放還)되었다.'- 인용문 중 '근읍'은 말 그대로 가까운 읍, 그리고 '방한'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러나 권서봉은 마음의 칼을 갈고 있었고, 이인좌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인좌는 사람을
[충북일보]권순명(權順明, 1876~미상)은 충북 제천 사람으로 후기의병에 참여하여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908년 10월 김춘쇠(金春釗) 의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의병전쟁에 참전하여 1년 2개월 동안 6백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가평과 강원도 홍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 의병의 본향 제천 장담에서 태어나다 권순명은 1876년 충북 제천군 근좌면 장담리(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서 태어나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제천 장담마을은 한말 의병운동의 발상지였다. 한말 의병사에서 제천은 그 중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천을 '의향(義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연원한다. 제천이 의병의 발상지이자 중심지가 된 까닭은 바로 제천 장담마을에 화서학파의 정맥을 이은 유중교가 살고 있었고, 스승을 찾아 온 그의 제자 유인석이 한 때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학문 세계를 철저히 존중하였던 이항로를 연원으로 한 화서학파는 전기의병을 이끌어 나갔다. 화서학파는 서세동점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정통 성리학적
[충북일보]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각도의 최고 무관, 즉 오늘날로 치면 방위사령관으로 종2품의 품관을 지녔다. 우후(虞侯)는 병마절도사를 보필하는 직으로 달리 아장(亞將), 부장(副將)으로 불렸고, 종3품의 품관을 지녔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직손인 이봉상(李鳳祥·1676-1728)이었고, 바로 밑의 우후는 박종원(朴宗元?-1728)으로 상당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을 급습하던 그날(3월 15일), 병마절도사(혹은 兵使) 이봉상은 질펀한 술자리를 가졌다. 후대의 표현이지만 다산 정약용은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감회를 읊었다.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群盜池邊礪鋒刃)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元師營中鬧絲竹)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紅酒··挾素妓)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劍及牙門·不起)'- 그러나 어찌됐건 병사 이봉상은 '국가'라는 제단에 피를 흘림으로서, 지금은 청주시 모충동의 표충사에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반면 당시 우후였던 박종원은 처음부터 무장답지 않은 길로 나갔다. 그는 이인좌 반란군이
[충북일보] 속보= 청주대학교가 청자 등 고가의 유물을 매입할 때 마다 감정위원회를 개최했으나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면이 많아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감정위원들은 적정 감정가격만 제시하지 청주대가 실제 그 가격에 최종 구입하는지는 모른다"는 발언이 나와, 이 부분도 함께 살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청주대는 김윤배 전총장이 재임하던 시기인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4년 동안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 13억 4천만원 어치의 유물 10점을 외부로부터 구입했다.(본보 4월 28일자 1면) 청주대 박물관은 그때마다 3~6인의 감정위원회를 구성, △매도 의사를 지닌 유물의 진-가품 여부 △유물의 재화적인 가치 △청주대의 적정한 매입 가격 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청주대 박물관 관계자는 "감정위원 중 한 사람이 의견을 취합해 감정 의견서를 썼고, 또 비전공자가 감정에 참여한 것은 당시에 복수감정이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때의 복수 감정은 도자기류와 전적류(고서적)가 당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에 진행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보가 확인을 한 결과, 이 관계자의 말은 일부 사실과 다른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
[충북일보] 세광고등학교(교장 이정배) 야구부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서 주관하는 '2024. 중부권 고교야구 주말리그(전반기)'에서 우승하며 대회 8년 연속 우승 신화를 써내려갔다. 세광고 야구부는 지난 3월 16일 충남의 강호 천안북일고를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10대 1로 승리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어진 3월 17일 청주고, 23일 온양BC와의 경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3승을 확보해 주말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는 고지에 올라섰다. 3월 24일 공주고와의 경기에서 6대 4로 승리한 후 4월 27일 열린 천안CS에 6대 2로 5차전 경기까지 모두 승리하며 총 전적 5전 5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세광고는 이번 대회 우승과 더불어 '78회 황금사자기 전국야구대회', '79회 청룡기 전국야구대회' 등 전반기에 열리는 모든 전국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됐다. 오는 10월 11일부터 울산광역시에서 개최되는 '105회 전국체육대회'에는 충북도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지난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52회 봉황대기 전국야구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전국 최고의 야구 명문 학교를 증명할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정배 세광고 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