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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채찬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선봉대장
충주 출신으로 소백산 등에서 수많은 전투
남만주로 망명…농장과 훈련의 '병농일치'
독립군 내부 갈등으로 옛동지 손에 희생
유해 찾지못해 현충원에 묘지없이 위패만

  • 웹출고시간2015.05.10 14:41:44
  • 최종수정2015.05.10 14:41:44

채찬(백광운)

채찬(蔡燦, ?~1924)은 한말 의병 출신으로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남만주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백서농장의 농감(農監)으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의용대장으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무장투쟁의 최선봉에서 활약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명으로 백광운(白狂雲)을 사용하였는데, 따라서 당시 '백장군'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채찬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되고,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군으로 투신하기 위해 남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구한말 국내의 의병이 망국 후 만주 독립군으로 전환한 역사적 사실을 실증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서간도지역에는 1911년 유하현을 중심으로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과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도 건립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년 동안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고, 만주 독립군의 근간이 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의병활동을 하였거나 나이가 들어 신식 무관교육만 받고 싶었던 사람들은 속성과정인 군사과에 들어갔는데, 채찬도 군사과를 졸업하였다.

채찬이 농감으로 활동한 백서농장의 농사 광경.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은 군사훈련, 자치·교육활동, 독립정신 고취활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채찬은 동창생인 신용관 등과 의기투합하여 백서농장 결성을 주도하였다.

◇백서농장의 농감(農監)이 되어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립운동가들은 일본도 전쟁에 휘말릴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중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백서농장을 설치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1914년 백두산 서쪽 산기슭에 세워진 백서농장은 식량 문제를 해결할 둔전을 운영하고 군사훈련을 병행한 병농일치의 군영 농장이었다. 백서농장은 장주(庄主)에 김동삼, 훈독에 양규열, 농감에 채찬, 규율대장에 신용관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농장은 이원체제로 운영되었는데 교육과 훈련은 훈독의 감독 하에 시행되었고, 작업과 농사일은 장주의 지휘아래 농감이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심산유곡 오지에서의 군영 운영은 그리 녹녹치가 않았다. 식량부족과 영양실조로 질병이 속출하면서 훈련과 농사도 더 이상 해나가기 어려웠다. 극한 상황에까지 몰리면서도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만 4년 만에 한족회의 결정으로 백서농장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군정서의 의용대장

1919년 3·1운동의 결과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족회는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같은 해 11월,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정부 아래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가 창설되자 채찬은 이에 적극 참여하여 의용대를 조직하고 만주와 국내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압록강 지역인 강계·삭주 등지에 들어가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유격활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채찬이 지휘하는 1중대는 1920년 5월 평안북도 강계군 문옥면 일제 경찰관서를 습격하였고, 같은 해 7월에는 이창덕으로 하여금 일제 앞잡이로 유명한 평안북도 후창군수 계응규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통의부 의용군 훈련광경(1922).

일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1920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북간도지역 8개현에서 한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방화하는 만행(경신참변)을 자행하였다. 만주지역 한인 독립군은 독립군의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대부분 북만주나 러시아로 이동하였다. 서로군정서 본부는 길림방면 액목현으로 이동하였는데, 채찬과 신용관 등이 지휘하는 잔여 병력은 남만주에 그대로 남아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경신참변 후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던 남만주 독립군들은 1921년 초부터 보민회, 조선인민회 등 친일단체들을 몰아내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서로군정서 의용대 제1중대 채찬과 신용관이 이 활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신용관은 1921년 8월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채찬은 그의 후임으로 중대장이 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어 나갔다.

전열을 재정비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의 간부들은 회합을 갖고 과거의 게릴라전을 청산하고 단체를 합하여 공동투쟁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고 곧이어 대한통의부로 재편되었다.

◇대한통의부로 통일된 독립군

1922년 8월 23일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대한광복군영 등 이른바 8단 9회 대표 71명이 환인현 마권자에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를 열고 대한통의부 결성 등 6개항을 결의하였다. 통의부는 남만지역 군사활동과 교민의 자치행정을 아우른 조직이며, 총장(김동삼) 아래에 민사·교섭·군사·재무·법무·학무·교통·실업 등 9개 부서를 두어 군정부의 형태를 갖추었다. 통의부의 결성은 연합체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군사적인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에 성립 초기부터 주요 간부들 사이에 복벽과 공화(共和)라는 이념 갈등과, 군권 장악을 둘러싼 인선과 조직상의 이견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양기탁과 의병계열의 추앙을 받고 있던 전덕원 간의 불화로 표출되었고, 상호 무력 충돌하는 이른바 '서간도사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복벽주의 계통의 전덕원 일파가 의군부를 조직하여 이탈한 뒤 채찬이 몸담고 있던 통의부와 잦은 마찰과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채찬의 지휘하에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사건을 대서특필한 독립신문 기사( 1924년 5월 31일자).

채찬은 1923년 12월, 통의부 제1중대장 자격으로 김원상과 함께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그간의 전말을 보고하고 임시정부 직할 군단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를 크게 환영하여 독립신문사장 김승학과 이유필을 파견, 조직사업에 협력케 하여 1924년 8월 통화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참의부 참의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독립운동단체의 최고기관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 채찬은 최석순, 최지풍, 김명봉 등과 함께 예하 약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참의부를 조직하였다. 참의부는 제1대 중대장인 채찬이 참의장을 겸임하고 5개 중대는 각 중대장이 중심이 되어 편제되었다. 참의부는 설립 초기부터 적극적인 국내 진공투쟁을 벌였는데, 이 시기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대에서 전개된 전투의 대부분은 참의부가 수행한 것이었다. 특히 1924년 5월 채찬은 이의준, 김창균 소대원에게 압록강 국경을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독립신문』에 대서특필되어 한민족의 항일투쟁의지를 더욱 고취시켰다.

◇독립군 내부파쟁으로 희생되다

참의부가 조직되면서 통의부와의 알력과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1925년 6월 참의부는 "통의부 간부들이 참의부를 질시하여 남만주 군단이 임시정부에 종속한 것을 치욕으로 여겨 성토문을 발표하고, 참의부 5중대장 김명봉을 통의부 불신 혐의로 사살하고 5중대의 무기를 강제로 압수하였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채찬의 사망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4년 9월 28일자).

또한 "1924년 9월 통의부 유격대장 문학빈이 부하 백병준, 백세우로 하여금 참모장 채찬을 사살하였다"고 밝혔다. 결국 무장투쟁으로 독립의 꿈을 이루려 했던 채찬은 어이없게도 독립군 내부의 파쟁으로 말미암아 옛 동지들의 손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독립군의 커다란 손실이었으며, 독립운동사에서 비극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를 찾지 못해 묘소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위패로 모셔져 있을 뿐이다.

/ 김미화(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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