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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조동호

서울에서 수학중 여운형 만나 평생 동지
일제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 두차례 옥고
일장기 말소사건 본래 조동호 등이 주도
여운형 피격 사망… 고향 옥천으로 낙향

  • 웹출고시간2015.06.14 17:33:44
  • 최종수정2015.07.05 21:26:15

조동호

[충북일보]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항일 언론과 사회주의운동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제의 핍박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며 민족의 해방을 꿈꾸었다. 그는 언론인으로 『독립신문』과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를 이끌어갔으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건국동맹 등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여운형의 평생지기 동반자로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다.

격랑의 시기 옥천 청산에서 태어나다

조동호는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조명하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이고, 호는 유정(榴亭)이다. 그가 태어난 1890년대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격랑의 시기였다. 소년시절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5년 사립신명학교(현 청산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1908년 상경하여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하였다. 측량학교는 우편학교와 같은 건물을 쓰고 있었는데 우편학교에는 여운형이 공부하고 있었다.

조동호 생가 터(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둘은 이때부터 서로 알게 되었고, 의기투합하여 평생 동지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한동안 측량기사로 일하던 그는 1914년 겨울, 여운형과 함께 독립운동을 결심하였고, 압록강 철교를 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조동호는 난징 진링대학(金陵大學) 사범과 중문학부(현 국립 난징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여운형은 영문학부에 들어갔다. 두 젊은이는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밤샘 공부를 하면서 1917년 졸업하였다. 이때 조동호는 여운형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는데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

난징대학을 졸업한 조동호는 상하이로 갔다. 이곳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와 『중화신보(中華申報)』의 기자가 되어 언론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또한 그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의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1918년 상하이에서 한국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도 참여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미국은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은 중국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상하이에 방문했다. 이를 독립운동의 호기로 생각한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크레인을 찾아가서 한국 대표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조동호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수학한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조동호와 여운형은 우리 민족의 참혹상과 일제의 야만적 침략을 적은 독립청원서를 만들어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에게 주었다. 파리강화회의 소식은 일본과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이에 일본에서는 유학생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여러 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졌고, 9월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조동호는 안창호·이광수·차리석·백성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 신문 기자가 아닌 떳떳한 대한민국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알렸다. 그는 철혈(鐵血)·냉열(冷熱)·철묵(鐵默)·묵망(默望)·첨구자(尖口子) 등의 필명으로 많은 논설을 써서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그 중 한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독립신문의 <독립완성시기> 기사.

"1년 내 못하면 2년 그도 못하면 3년 4년 내지 10년을 가더라도 2천만이 다 죽기까지는 맹세코 기필코 우리의 신성한 국토 내에서 우리를 노예로 하는 원수의 왜 민족을 축출하고 말리라 함이 2천만 대한민족의 결심인 줄 알고 왜적은 전율할 지어다(『독립신문』 1919년 11월 1일 24호, 「독립완성 시기」)."

조동호는 사회주의 활동가로도 활동하며 한국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21년 7월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1922년 10월에는 독립전쟁을 위해 1만 병력 양성, 10만원 자금 모금을 목표로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또한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서는 한국인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이 핍박받는 현실에 대해 발표하였다. 1923년 12월 귀국 후에도 1924년 11월 화요회 가입,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당 및 조직, 1925년 6월 조선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 코민테른 정식 승인 획득 등 다양한 사회주의 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내에서의 언론과 사회주의 투쟁

1923년 귀국한 그는 곧 바로 ·동아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기사와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 등 탄압에 압박을 느낀 그는 1924년 10월 중국의 펑즈전쟁(奉直戰爭)을 취재하기 위한 특파원으로 떠났고, 관련기사를 『동아일보』 1면에 20회 가량 기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대 관심 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그는 특파원을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사를 썼다.

압송되는 조동호

동아일보, 1928년 9월 12일

"중국 일도 중국 일이지만 우리 임시정부에서도 그동안 새로운 변동이 있어서 박은식(朴殷植)선생의 통령하(統領下)에 이유필(李裕弼), 이규홍(李圭洪)씨 등 유위(有爲)의 인물이 보필(輔弼)의 임무를 당해서 이상적 새 국면을 포설(布設)하려고 무한이 노력을 하며 또 다대한 희망이 비치는데 박노(朴老:박은식) 선생까지 절대한 자부심으로 여러 가지로 진력하심에는 무지한 이 사람도 기쁨을 못 이기겠다(『동아일보』 1925년 1월 28일, <귀도(歸途)에 임(臨)하야>)."

그가 쓴 기사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제에게 조동호는 눈엣가시였다. 일제는 그를 잡아들일 구실을 찾았고, 결국 그는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28년 상하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4년형을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의 체포 소식은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는 1932년 12월 출옥하여 신병을 치료하면서도 언론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듬해 그의 형 조동석과 사촌동생 조동순, 그리고 조동순의 처남인 윤희중의 출자로 『중앙일보』를 인수하고 『조선중앙일보』로 이름을 바꾸고 확장하였으며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조동호는 편집고문으로 무기명 논설을 집필하였다. 조동호가 계속 항일 논설을 기고하자, 일제는 또 다시 그를 구속할 구실을 찾았다. 당시 김단야와 박헌영 등은 꼼뮤니스트 그룹을 결성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젊은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을 쏟던 여운형은 정태희를 상하이 연락책으로 삼았고, 조동호에게 정태희를 맡겼다. 그러나 정태희가 출국하려다가 1933년 10월경 상하이행 기차에서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로 수감되고 말았다. 곧 조동호도 다시 붙잡혀 1933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2년 4개월간 신의주형무소에 옥고를 치러야만 하였다.

1936년 2월 26일 조동호는 출옥하자마자 다시 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논설을 게재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 넣었다. 그러던 와중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다. 원래 일장기가 말소 사진은 『조선중앙일보』에서 제작한 것이었고, 이를 『동아일보』가 다시 게재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는 『조선중앙일보』 사주와 운영진에게 사장을 교체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이에 저항하다가 1937년 11월 결국 폐간 당하고 말았다. 1938년 일제의 예비검속자로 지명되어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던 그는 경북 봉화군으로 피신하여 해방 전까지 사금광 현장인 대륙광업사에 숨어 지냈다.

해방 후의 정치 활동

일제의 패망이 목전에 닥친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 김진우 등과 조선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창건하고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군사양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농민동맹을 만들어 농민조직을 활용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내무부와 군사위원회를 담당하였다. 그는 비밀리에 활동하던 중 1945년 8월 5일 부민관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관철동 집회소에서 붙잡혀 경기도 경찰부에 투옥되었다.

대전현충원 조동호 묘소.

해방 후 조동호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을 맡았지만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되어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유정정치학교, 실업자동맹을 설립하고, 미소공동위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에도 관여하였지만, 평생 동지였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사망하자 정계를 떠나 충북 옥천으로 낙향하였다. 조동호는 투병 중 1954년 9월 11일 오후 1시에 고향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분단 현실에서 조선공산당 등 사회주의계열의 운동 전력이 장애가 되어 인정받지 못하였다. 2005년에 이르러 여운형 등 사회주의계열의 활동이 독립운동이 인정되었고,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이에 따라 당초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해월리에 있던 그의 묘소는 이해 8월 30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 김태인(충북대학교 사학과 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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