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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서상열

 성리학 화서학파 계승한 제천의병의 선봉장
 무관 출신이면서 문장에도 능하여 문집 다수
 강원도 화천전투에서 새벽까지 싸우다 전사
 길가 매장됐다가 3달후 지금의 '제천 안식처'

  • 웹출고시간2015.11.22 17:33:39
  • 최종수정2015.11.22 17:33:46

서상열 묘소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곡리

[충북일보] 서상열(徐相烈, 1854∼1896)은 1895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선봉장 역할을 한 인물로, 학문으로는 김평묵과 유중교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서학파를 계승하였다. 그는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강경한 투쟁노선을 갖고 대항하면서 의(義)를 실천하고자 분연히 일어난 한말 전기의병장이다.

◇위정척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다

서상열 영정

ⓒ 독립기념관 소장
서상열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서제순(徐濟淳)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호는 경암(敬菴), 당호는 춘수당(春睡堂)이며, 본관은 달성이다. 서상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인품이 바르고 굳세었다고 한다. 그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지냈으며, 문장에도 또한 능하였다. 그는 당시 조정에서 묄렌도르프[P.G M·llendorf, 穆麟德]를 병조참판에 임명하자 이를 개탄하며 '이런 판을 어떻게 사대부가 벼슬할 만한 때라고 하겠는가' 하고서는 포천으로 낙향하였다.

서상열은 영평(永平)에 거주하였던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화이(華夷)와 인수(人獸)에 대한 분별을 깨닫고 위적척사사상을 강화하였다. 이후 1889년 유중교(柳重敎)가 제천 장담으로 이주하였음을 듣고는 가산을 모두 팔아버리고 청풍 안간리(현 금성면 활산리)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에 장담마을로 들어갔다.

을미제천의병 창의 120주년, 광복 70주년 기념 제천문화원 특별전

'의병, 묵향으로 피어나다'(2015년 8월 14-16일).

서상열은 1893년 유중교가 사망하자 3년의 복상을 치렀으며, 이후 유중교 문하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는 1895년부터 유중교의 유문을 모은 『성재집(省齋集)』 간행을 주도하였으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일을 끝내지 못하였다.

서상열은 장담의 강학을 이끌면서 유학 및 선비의 실천에 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 글은 그의 손자 서정국(徐廷國)이 수집하여 엮은 『경암집(敬菴集)』과 유문을 모은 『춘수당일기(春睡堂日記)』로 전한다. 올해 8월 제천문화원에서는 "의병, 묵향으로 피어나다 서상열 선생 展"을 열어 100년이 넘은 영정과 첫 의병전투를 나가기 전 조상에게 올렸던 고유문(告由文), 간찰 등 20여점의 귀중한 유물과 유품을 전시한 바 있다.

◇의병봉기를 재차 주장하다

서상열은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나라를 걱정하며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는데, 특히 1894년 발표된 변복령(變服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바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유인석(柳麟錫)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이듬해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에도 9일 동안 통곡을 하며, 다시 의병봉기를 추진하였으나 호응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실패하였다.

서상열 의병장 일기

ⓒ 독립기념관 소장
그는 의(義)를 위해 바로 행동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한 상황에 통탄하며, 다시 의병봉기를 작정하고 그 의지를 굳히고자 포천의 선영을 찾아가 참배하였다. 이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아들이 이적이 되고 금수가 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차라리 먼저 죽여 자정(自靖)토록 하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상황에 굴복치 않고 직접 맞서기 위해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서상열은 1895년 11월에 내려진 단발령으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가, 같은 달 음력 28일 지평에서 유중교 문하의 동문인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가 김백선의 포수부대를 기반으로 원주 안창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12월 3일 제천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제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필희(李弼熙)·오인영(吳寅泳)·배시석(裵是碩)등과 함께 거의에 참여하였다. 당시 동지들은 서상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단양에서 온 이필희에게 양보하고 군사(軍師)가 되었다. 이는 선비이자 무인으로서 대외적인 역할에 연연하지 않고, 위정척사사상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서상열과 제천 장담의 선비들은 지평의진에 합세하여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다. 이후 단양 장회협에서 관군과 싸워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충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 연합세력과의 계속된 전투로 다수 부상자가 발생하자 포군들이 동요하면서 흩어졌다.

장수 가운데는 영남 각지의 의병들과 합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6년 2월 7일 장담의 선비들을 이끌고 있던 유인석이 영월에서 새로 대장으로 추대되어 부대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이들을 제천의병, 또는 호좌의진(湖左義陣)이라 한다. 서상열은 호좌의진 소모대장으로서 주로 본진을 지원하는 별동부대에서 활약하였다.

제천에 근거지를 마련한 제천의병은 충주성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는데 서상열은 제천을 지키면서 주력부대를 후원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의병부대는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리하며, 갑옷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을 하였다. 또한 그는 1896년 1월 5일 유인석의 의병부대가 충주성에 들어가게 되자, 군사를 휴식토록 하고 군량을 비축할 것과 부대를 영남으로 파견하여 의병진을 연합하여 세를 확대할 것을 건의하여 앞으로 벌어질 관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대비하고자 하였다.

◇일본 병참을 공격하다

서상열은 호좌소모토적대장(湖左召募討賊大將)이 되어 원용정(元容正)과 함께 영남지역으로 나아갔다. 그는 영남 각기에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에 여러 의병장들이 호응하여 참가해 왔다. 서상열은 휘하에 3,000여 명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여러 장수들은 예천에서 그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서상열의 유묵 우국시(憂國詩)

ⓒ 후손 서홍석 소장
당시 영남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서상열이 짧은 기간 동안 이와 같은 인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풍에 살았던 종제 서상철(徐相轍)이 이미 1894년 8월 안동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태봉을 공격하였다가 청풍으로 퇴각하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서상열의 통솔아래 영남의 연합의진은 2월 16일 상주 태봉에 있는 일본군의 병참을 공격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서울과 부산 간에 그들이 설치해 놓은 통신선을 보호하기 위한 병참을 두었는데, 제천의병은 초기부터 이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험 미숙과 구식무기로 무장한 서상열의 연합의진은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결국 서상열은 잔여 병력을 이끌어 예천을 거쳐 명봉사(鳴鳳寺)로 회군하였으나, 안동과 대구를 거점으로 한 안동관찰사 이남규(李南奎)와 대구관찰사 이중하(李重夏)의 공격을 받고 패전하여 제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유인석의 명을 받아 다시 단양으로 나아가 제천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4월 13일 제천의진이 무너지면서 안승우와 그의 부장인 홍사구(洪思九)가 적을 막다가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제천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좌우의 만류로 단양을 지키면서 유인석을 비롯한 제천의병 본진을 맞이하였다. 4월 18일에는 유인석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소토군을 인솔하여 풍기로 넘어갔다가, 다시 4월 21일 영춘에서 본진과 합류하였다.

◇제천의병,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다

1896년 9월의 전투에서 제천의 근거지를 상실한 제천의병은 외곽지대를 전전하면서 재기를 위해 노력하였다. 서상열은 유인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북으로 근거지를 넓히고자 건의하며, 자신이 앞장서서 인도하여 적을 물리쳐 나갈 것이니 본진은 그 뒤를 따르는 것을 논의하였다. 이에 제천의병은 서북의 황해·평안도 지방으로 가서 그곳의 인물들을 모아 다시 중앙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도로장(道路將)이 되어 본진에 앞서 길을 개척하는 역할을 맡았다.

서상열이 의병전투에 나가면서 조상들께 올린 고유문

ⓒ 후손 서홍석 소장
앞서 이동 중이던 서상열 의병부대는 1896년 6월 13일 낭천(狼川, 현 화천)에 주둔하였는데, 이때 낭천군수 함은준(咸殷俊)의 간계에 빠져 복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 새벽까지 화천 전장골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끝내 전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길가에 묻혀 있다가 유인석이 주현구(朱鉉九)와 이기진(李起振)을 보내어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의치 못했고 결국 석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반장(返葬)해 와서 장담마을 맞은편 구곡리(九曲里) 계곡 안에 안장하였다.

◇행동하는 지식인, 의(義)를 실천하다

그의 사후에 동지들과 문하생들은 제문을 보내어 추도하였으며, 그의 절개가 숭산(崇山)과 교악(喬岳)과 같이 높아 욕된 삶보다 영광스런 죽음을 선택한 진정한 대장부라 칭하였다. 그는 위정척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이를 행동으로 표출시킨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서상열의 집안은 서광범(徐光範)과 같은 개화파와 인척관계로 직접 재물을 후원받고 있었지만, 그는 개화기 서구문명의 외형적인 모습에 매몰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생각했던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서상열은 한말 전기의병이 세력을 다시 도모하고자 만주로 옮겨갈 때에 길을 개척하는 도로장이 되어 훗날 항일운동의 맥이 이어지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전상미(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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