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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손승억

충주 신니 용원장터의 3·1만세 주도 "자결순국"
독립 선언서 필경·등사하고 태극기 제작
출옥하던 날 옥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
결국 재차 옥고… 출소후 자결로 생 마감
마을 자랑비, 일부 사실관계 잘못 기록해

  • 웹출고시간2015.04.05 15:31:03
  • 최종수정2015.04.05 15:31:03

손승억.

손승억(孫承億, 1893~1934)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될 만큼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1919년 충주에서 비밀결사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였고, 4월 1일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이다.

또한 출옥하던 당일에 옥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재차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결국 자결로써 불굴의 항일의지를 표출하며 장렬히 순국하였다는 사실 정도이다. 많지 않은 자료이지만, 손승억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온 몸으로 항거한 항일투사라 할 수 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이

그의 생가 입구에 세워진 방추마을비와 묘소 안내판.

손승억은 1893년 10월 21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에서 아버지 손석우(孫錫祐)와 어머니 안산김씨(安山金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해손씨(平海孫氏) 39세손이다. 그의 가문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등을 배출한 명문 양반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잘 알 수는 없다. 다만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부정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였기 때문에 어려서 서당을 다니며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고 전한다. 손승억의 사제관계는 확인되지 않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충주 신니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오후 2시경,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는 별개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학생들과 시민 등의 시위대는 공원 밖으로 진출하였다. 시위대에는 남녀노소·상인·농민·학생 등 누구를 막론하고 참여하였다.

종로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여러 대열로 나뉘어졌는데 한 대열은 종로, 광교, 경성부청 앞, 남대문 등을 거쳐 프랑스 공사관으로 행진하였다. 다른 대열은 종로에서 출발하여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세를 부른 후 구리개(현 을지로)로 향하였다.

여기서 다시 나뉘어져 일대는 미국 영사관으로 향하였으며 다른 대열은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이외에도 또 다른 시위대는 소공동을 거쳐 총독부로 향하려고 진고개(현 충무로)로 행진하였고 육조 앞 일대(현 세종로)도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찼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서울과 동시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이 사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군중을 조직화한 까닭이었다.

거족적인 만세운동의 물결은 충북지역으로 밀려왔다. 충북에서도 3월 초순부터 독립선언서가 발견되고 만세운동의 움직임이 있었다. 충북에서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3월 19일 괴산읍 장터에서 홍명희(洪命憙)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그는 이날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손병희(孫秉熙)를 만나고 귀향한 뒤 숙부인 홍용식(洪用植), 이재성(李載誠) 등과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한 것이었다.

이는 전국에서 가장 늦은 출발이었다. 이처럼 충북지역의 만세운동이 늦게 시작된 까닭은 교통의 불편, 종교조직의 미약, 학생층 등 독립운동 주체세력 역량의 미성숙 등이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충북지역에서는 4월 19일 제천 송학의 만세운동까지 만 1개월 간 도내 각 곳에서 만세함성과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당시 조선군 참모부의 비밀문서에서 충청지역을 경기지역 다음의 위험지역으로 간주할 정도로 만세운동은 격렬한 양상으로 도내 전역에서 매일 전개되었다.

충주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경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주도로 시도되었다. 교사 류흥식(柳興植)과 학생 오언영(吳彦泳) 등은 호암리 범바위의 졸업기념 야유회 자리에서 충주 장날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충주농업학교 및 보통학교 학생들과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결의하였고 예수교 측과도 교섭하여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내부의 밀고로 일제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3월 11일 달천리에서는 천도교도 홍종호(洪鍾浩)와 김흥배(金興培) 등이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읽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으나 충주에서 출동한 헌병들에게 제지당하였다.

충주의 만세시위 계획에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류흥식, 곧 류자명이다. 수원농림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3·1운동의 물결이 밀려오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충주경찰서에 근무하는 동창생으로부터 계획이 탄로 났다는 귀띔을 받고는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즉, 김원봉, 김성숙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의 좌파 트로이카를 이뤘고, 중국에서 손꼽히는 농학자로 대성한 류자명은 충주 3·1운동의 계획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신니면의 만세운동은 4월 1일 용원장터에서 손승억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당시 26세의 청년이었던 손승억은 은경옥(殷慶玉, 단경옥이라고도 기록됨), 이강렴(李康濂) 등 8명의 동지와 결의하여 비밀결사 독립단을 조직하고 동지의 규합과 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3월 31일 이희갑(李喜甲)의 집에 모인 손승억과 동지들은 4월 1일의 용원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들을 독려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손승억은 독립선언서의 필경과 등사를 담당하였고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손승억은 약 500여명의 군중이 모인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즉각 달려온 일경이 칼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손승억·은경옥·이희갑 등의 주도자를 체포하였다. 일경은 체포한 주도자들의 상투를 자르고 고문을 가하며 만세운동을 제지시키고자 하였으나, 손승억 등이 완강히 항거하자 충주 헌병대로 송치시켰다.

손승억의 고등법원 판결문.

그 해 5월 13일, 손승억은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 항소를 하며 법정투쟁을 펼쳤다. 하지만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확정 받아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의 항일의식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청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던 당일, 옥문을 나서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고 곧바로 재수감되었다.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다시 치른 후에야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평생소원은 대한독립만세이다

1922년, 손승억은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없었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오랜 시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고문을 받아 몸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옥고를 치르는 도중 그는 안질, 위장병, 관절염 등의 병을 얻어 자택에서 투병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경과 헌병의 감시가 삼엄하였다.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도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어서 가족들이 회사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1934년 4월 16일, 손승억은 결국 자결 순국의 길을 선택하였다. 비록 항일 의식은 여전하였으나 건강 악화와 일제의 감시로 뜻을 펼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개탄하곤 하였다. 또 가족들에게 늘 '왜놈의 치하에서는 살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고 한다. 그가 자결순국한 시간은 새벽 무렵이라고 한다. 그는 가족들에게 '나의 평생소원은 대한독립만세이다'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손승억은 방추마을 생가의 뒷산에 묻혔다. 방추마을 입구에 그의 묘소 방향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마을비와 함께 서있다. 1993년에 마을 주민들이 세운 방추마을비에는 손승억의 독립운동의 사실을 자랑스레 기록하고 있으나, 그가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한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손승억 묘소(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

그의 묘소는 길을 잘 아는 주민이나 후손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찾기 힘들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73년 10월, 방축마을에 있는 그의 묘소는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방추마을에 있던 본래의 묘소도 온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까지 모시고 있다.

용원초등학교 입구에 세워진 신니면민만세운동유적비.

용원초등학교 정문 우측에는 2003년 신니면민만세운동유적비건립추진위원회가 세운 '신니면민만세운동유적비'가 우뚝 서 있어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게 한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호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전임연구원·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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