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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이중봉

이강년 의병장이 가장 신뢰한 호좌의진 소모장
제천출신 후기의병…군대 강제 해산당하자 봉기
문경 전투에서 부상…단양으로 이송돼 치료받아
복상골 전투에서 피체…감옥에서 아들 사망소식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불구 후손 아직 안 나타나

  • 웹출고시간2015.12.03 15:12:35
  • 최종수정2015.12.03 15:12:43
[충북일보] 이중봉(李重鳳, 18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이강년 부대에서 활동했던 후기 의병이다. 그는 일제의 가속되는 침략과, 특히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소식에 분개하여 의병으로 봉기하였고, 이강년 부대에서 우군장과 소모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제천을 중심으로 한 호좌의진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이강년이 가장 신뢰한 부하 의병이었다.

◇나라의 멸망을 지켜보며 통탄하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의 이중봉 생가 전경.

이중봉은 충청북도 청풍군 도화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도화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중봉(李中鳳)을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이나 가족, 어린 시절 등에 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거의 알 수 없다. 국가보훈처에서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조차 그의 생몰년이 모두 미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1908년 일제의 통감부 문서를 통하여 그가 1871년 출생이라는 사실과, 『폭도사편집자료(충청북도편)』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청풍군 출생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다. 서구 열강은 자신들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침략하고 이권 획득에 혈안이 되었다. 조선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여러 노력들을 기울였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속에서 서구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끝내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시키고 조선을 강제 개방시켰다. 이후 일제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끊임없이 탄압하고 청일전쟁, 을미사변 등을 일으키며 조선의 식민지화를 진행해 나갔다. 이중봉은 이 같은 상황을 목도하며 '이 나라의 인민된 자라면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는가, 충성심과 분통이 복받쳐 어느 때이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하며 분개해 하였다

그런데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그가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1896년 예안(경상북도 안동)에서 이만응(李晩應)·금봉술(琴鳳述)·이만윤(李晩允)·김수현(金壽鉉)·이중린(李中麟) 등과 의병으로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예안통문(禮安通文)'을 유포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참여한 이중봉은 동일인이 아닌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안통문'에 참여한 이중봉이 이중린의 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진성이씨 상계파 족보를 확인한 결과, 『독립유공자공훈록』 기재 내용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일제의 침략에 의병으로 맞서다

일제는 치밀한 계획 아래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차근차근 실행해 나갔다. 1904년 2월, 일본은 조선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하여 한반도 내 영토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외국인 용빙조약)을 통해 외교와 재정부문에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광무황제(고종)는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 및 외국인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오히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 한편, 대한제국의 마지막 명맥이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이중봉의 의병 동기와 그 과정 진술서(1908.6.2).

1907년 6, 7월경(음력), 이중봉은 고향인 청풍에서 머물고 있다가 『대한매일신보』을 통하여 군대해산과 일본의 압제에 대한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신문을 돌려 읽고, 급박하게 돌아가던 나라의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 통감부의 전횡과 악정은 평소 충의의 마음을 갖고 있던 그를 더욱 분발하게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원주진위대의 해산 소식을 계기로 의병으로 나섰다.

◇이강년 부대에 참여하다

도창의대장 이강년

ⓒ 독립기념관 제공
그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은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제천에 집결한 여러 의병부대는 천남전투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 입히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의병들은 강원도 주천으로 이동하여 부대의 재편성을 추진하였고,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였다. 이때 이중봉은 우군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천남전투 이래 이강년이 이끄는 호좌부대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후에 이강년이 피체되어 심문을 받던 중 "각지에는 의병이라 칭하는 자가 많다고 할지라도 국가에 다하는 성의에서 나온 자는 참으로 적다. …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겨우 이중봉 정도의 인물일 것이다."라고 하며 그에 대한 강한 신뢰를 표시하였다.

이강년 부대는 여러 곳으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문경 갈평에서 적을 대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의 추적은 더욱 강화되었고, 1907년 9월 15일 문경 적성에서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이 인솔하는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그의 직책은 확실하지 않지만 『창의사실기』에서는 후군 중장, 『운강창의일록』에서는 우군장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이중봉은 적의 탄환에 부상을 당하였고, 본진이 이동해 있던 단양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총상이 완치되자 그는 다시 활발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운강창의일록』에 의하면 그는 10월 연풍전투에 우군장으로 참여하여 총독장 이만원(李萬源), 선봉장 권용일(權用佾) 등과 함께 적 4명을 죽이고 3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여러 전투에서 이강년 부대의 활약은 눈에 띄었지만 항상 승리할 수는 없었다. 이강년 부대는 11월 영춘에서 일본군 제14연대와의 전투 중 종사 주범순(朱範淳)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부대는 의병 초모사업과 정탐활동을 하며 전열을 가다듬었고, 이중봉 또한 여기에 참여하였다.

◇복상골 전투에서 붙잡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의병들의 활동이 주춤하자 일제는 병력을 증원하여 의병 탄압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의병이 지나는 촌락들을 불지르는 등 초토화시켜 의병의 활동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영월을 근거로 하여 겨울을 보내려던 이강년 부대는 끊임없이 추적해오는 일본군을 피해 이동하는 한편 적과 전투를 하여야 했다. 하지만 탄환의 부족과 의병들의 피로 누적, 사방에 매복한 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의병부대는 계속해서 피해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강년은 계속되는 강행군으로 병을 얻었지만 행군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중봉이 일제에 붙잡힌 복상골 의병전투지

ⓒ 독립기념관 제공
적을 피해 진을 옮기며 단양으로 이동한 이강년 부대는 복상골에 주둔하여 주위를 정탐하고 부대를 정비하려 하였다. 그런데 근처에는 이강년 부대를 추적해 따라온 적이 숨어 있었다.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의병 부대는 순식간에 사방에서 포위해 오는 제1순사대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이강년은 별포장 이문경(李聞慶)의 사격으로 적의 접근을 막으면서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 3시간동안 벌어진 전투로 인해 의병들은 모두 흩어졌고 서로의 생사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의병 14명이 사망하고 당시 소모장 이중봉과 참모 원철상(元哲常), 포군 이달(李達), 신숙(申木+肅), 신명희(申明熙) 등 11명이 피체되는 피해를 입었다. 부대를 정비할 틈도 없이 이강년은 일본군의 재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북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수감 중인 이중봉이 충주경찰서장에게 보낸 호소문(1908.6.2).

1907년 12월 복상골 전투에서 일제에 붙잡힌 이중봉은 충주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던 중 유배형이 확정되었지만, 일제는 판결한 지 세 달이 지나도록 유배지를 정하지 않고 감옥에 가둬두었다. 막연히 감옥에서 형의 집행을 기다리던 그는 31세 된 자신의 동생과 사촌동생, 5세 되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들의 사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는 이 같은 가족의 비보에 대해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한 것을 통탄해 하며, 자신의 형 집행을 조속하게 시행해 주기 바라는 청원서(1908. 6. 2)를 충주경찰서장에게 제출하였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고, 그의 몰년조차 미상인 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운강창의일록』에는 그가 종신 유배형을 받았다가 사면을 받고 고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생가 마을 도화리 표지석과 마을자랑비. 이중봉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현재 이중봉은 후손이 없어 훈장 미전수 독립유공자로 처리되어, 국가보훈처에 훈장이 보관되어 있다. 고향인 제천시 청풍군 도화리에는 촌로들조차 그를 기억하는 이 없고, 마을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마을자랑비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불과 백여 년 만에 그의 충의정신과 의병의 역사적 사실은 까맣게 잊혀가고 있는 것이다.

/ 홍순영(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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