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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민강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약종상(藥種商)
청주시 남이면 출신…부친과 함께 '동화약방' 창업
궁중 비방에 양약 가미…그 유명한 '부채표 활명수'
3.1운동 때는 운영하는 약방에서 전단 인쇄해 배포
두차례 옥고치르면서 후유증 48살 짧은 생애 마감

  • 웹출고시간2015.05.17 20:28:07
  • 최종수정2015.05.17 20:28:07

민강의 임시정부 지원활동 사실을 기록한 서울연통부기념비(서울 중구 서소문로 9길 14 동화약품 창립지)

ⓒ 출처=동화약품
[충북일보] 민강(閔橿, 1883~1931)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대동단(大同團)에 참여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더불어 국내와의 연계를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다. 이 때 민강은 동화약방(同化藥房)의 창업자이자 초대 사장으로서, 서울연통부의 책임자로서 활동하였고, 동화약방은 그 거점이 되었다. 민강을 독립운동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동화약품(전, 동화약방)의 '부채표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민강은 1883년 충북 청원군 양촌리(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민병호는 1882년 폐지된 선전관청의 선전관이었다. 그는 궁궐에 드나들며 평소 친분 있게 지낸 전의에게 궁중 비방을 전해 듣고, 그 비방에다 양약의 장점을 가미하여 활명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장남인 민강과 함께 동화약방을 창업하였다.

민강

ⓒ 동화약품
구한말 민강은 국운이 기울어짐을 안타까워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화약방 내에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그는 교사에게는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육의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던 학생들에게도 월급을 주며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07년에는 평소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과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세우고, 서울대 약학대학의 전신인 서울약학교 설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며 민족교육사업의 일선에 나섰다.

1909년 그는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남형우·안희제·서상일·신백우 등 각계 인사 80여 명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시작이 되었던 대동청년단은 해방 당시까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단체이다. 따라서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자료에 따라 '단(團)'과 '당(黨)'을 명칭으로 혼용하고 있다.

민강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위해 작성 배포한 국민대회선포문.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기관 중 하나였던 백산상회 지배인 윤병호가 남긴 '단규(團規)'를 통해 비밀결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단규'에 의하면 첫째, 단원은 반드시 피로써 맹세할 것, 둘째, 새 단원의 가입은 단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을 것, 셋째, 단명이나 단에 관한 사항은 문자로 표시하지 말 것, 넷째, 경찰 기타 기관에 체포될 경우 그 사건은 본인에만 한하고 다른 단원에게 연루시키지 말 것 등이었다. 곧, 대동청년단은 철저한 비밀결사로서 존재하였던 것이다. 다만, 자료의 부족으로 대동청년단에서 민강의 구체적 활동상은 확인하기 어렵다.

△임시정부조직에 참여하다

1919년 3·1운동 때에 민강은 자신이 운영하는 동화약방에서 전단을 인쇄하는 등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후 그는 홍면희·안상덕·이규갑 등의 인사와 함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의 성립과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때 그의 주된 역할은 연락·주선·준비 등의 중책을 맡았으며, 동화약방을 연락거점으로 삼아 자금조달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성임시정부의 설립 준비는 3월 중순경부터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한남수·김사국·홍면희·이규갑 등이 추진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회합하여 각 방면으로 동지를 구하며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고, 4월 2일 대표자들이 인천의 만국공원에서 모여 정부 수립 문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민강은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준비회의를 가졌다. 대표자들은 임시정부 조직과 국민대회 개최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고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약법(約法) 등을 작성하였다. 또한 4월 23일을 임시정부 수립 선포일로 결정하고 국민대회 개최 등 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민강은 현석칠과 함께 국민대회 취지서·결의문·약법·선포문 등을 인쇄하였다. 4월 23일, 서울 시내 각처에는 이들이 만든 각종 인쇄물이 살포되었다.

민강의 재판 판결문

(고등법원, 1921년 5월 7일)

한성임시정부는 국내에서 '13도 대표자대회'와 '국민대회'를 통해 국민적 기반과 절차를 거쳐 임시정부 조직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1919년 9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을 선언한 임시정부가 상하이로 통합될 때 법통성과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민강은 한성임시정부 조직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동화약방을 연통부 거점으로

서울연통부는 1919년 7월 상하이임시정부가 국내와 국외를 연락하는 방법으로 연통제를 실시함에 따라 서울에 설치한 비밀 행정부서였다. 서울 연통부의 주된 임무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서울 거점으로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서울 시민에게 알리고 국내로부터 정보 수집과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당시 대동단원으로 활동하던 민강은 서울연통부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거점을 동화약방 내에 설치하였다. 당시 민강과 서울연통부의 활동상은 임시정부 비밀요원이었던 윤종석의 공판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 윤종석은 송세호, 나창헌 등과 함께 각도 감찰부(監察部)의 임무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이어 윤종석은 이종욱으로부터 상하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내방하는 동지를 접대하고 문서를 접수할 장소의 설치와 기관 선정을 부탁 받자, 동월 경성부 화천정(和泉町) 5번지 민강의 집에 들어가 동 취지를 밝히고 상하이 방면에서의 내방자가 암호를 사용하여 오면 동지로 인정하고 이를 윤종석에게 통보할 것, 기밀문서는 자기의 영업장소인 경성부 남대문통 5정목 7번지 공성운송점 사무실 남창우(南昌祐)의 집 박춘식(朴春植) 앞으로 보낸 뒤 통보할 것을 약속받았다. 동월 30일 안동현(安東縣) 방면에서 박만식(朴萬植)이 와서 암호를 사용하자 민강은 이를 윤종석에게 통보하였다."

민강이 서울연통부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고, 동화약방 터가 항일 의거 유적지로 선정되었다. 이어 이듬해 광복절에 동화약방 자리였던 서울시 중구 순화동 5번지(현,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로 9길 14) 동화약품(주) 건물 앞에 서울연통부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서울연통부의 설립과 활동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대동단에 참여하다

대동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다. 대동단의 결성은 1919년 3월 말경 이뤄졌으며, 주도한 이는 김가진·전협·최익환·김찬규 등이었다. 대동단에는 관료, 유림, 학생, 의병, 승려, 여성, 보부상 등 각계각층에서 수만 명의 단원이 참여했으며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며 약칭하여 대동단이라 하였다.

이 단은 설립 취지문에서 일본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형성하고, 세계의 평화를 확보하며,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는 등의 3대 강령을 내세웠다. 대동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선전과 자금 모집, 항일 무장조직을 위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또한 대동단은 ≪대동신보(大同新報)≫를 비밀리에 제작, 배포해 조선 민중들에게 독립운동에 힘쓸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11월 대동단은 김가진과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시키기 위한 망명을 시도하였다. 김가진은 망명에 성공하여 먼저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의친왕 이강은 중국 안동현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조직이 탄로나 망명을 주도했던 간부 전원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동단 조직이 발각되어 수많은 단원들이 피체되며 대동단도 해체의 위기를 맞았다.

당시 민강은 일제의 천장절(天長節)에 독립만세시위를 거행하기 위해 서울의 학생 청년 단체를 동원하는 책임을 맡고 강매와 함께 이 일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예정보다 연기되는 바람에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민강은 1921년 3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교민단의사회(僑民團議事會)의 학무위원(學務委員)을 역임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다. 다시 국내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어려워진 동화약방의 재기를 위하여 힘썼다. 그러던 1924년 다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후유증으로 1931년 11월 4일 48세의 일기로 사거하였다.

민강!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에 적극 참여한 교육자로서, 또한 자신이 운영하던 동화약방을 서울연통부 연락기점으로 활용한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근세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정부는 이 같은 민강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 이순아(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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