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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3·1운동

도내 최초는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
출발은 다소 늦었으나 장기적으로 전개
최소 50회 이상 시위, 희생자 다수 발생
민족자결주의에 대해선 '낭만적 환상'

  • 웹출고시간2015.02.22 18:21:36
  • 최종수정2015.02.22 19:10:47

청주 3.1공원 내 민족대표 동상.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

2. 충북의 3.1 운동과 충북 출신 민족대표

3.1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평가되는 거족적 항일투쟁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요원의 불길처럼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갔고, 해외에서도 한민족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세함성이 메아리쳤다. 충북에서는 3월 19일 괴산 장터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 제천 송학면 만세시위까지 만 1개월 동안 도내 전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본 호에서는 96주년 3.1절을 맞이하여 충북에서 전개된 3·1운동의 통계와 성격, 충북 출신 민족대표의 독립사상을 정리하기로 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충북 3․1운동 통계

◇ 충북의 3.1운동 통계

96년 전, 충북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의 3·1운동이 전개되었을까? 이 물음에 답을 주는 자료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박은식이 3.1운동 통계를 정리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이다. 여기에 나타난 충북의 3.1운동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국내로부터 전해들은 사실을 토대로 상하이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정확성이 떨어진다. 충북 3.1운동의 통계 작성에 좀 더 정확을 기하기 위해서는, 일제 경찰이 그날그날의 만세운동 상황을 상부에 보고한 「일차보고(日次報告)」를 정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나타난 충북의 3.1운동 일자별 전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 자료에 나타난 충북의 3․1운동 일자별 상황

괄호 내 숫자=지명(발생횟수), 출동병력(출동개소), 사상자(일본 측 사상자)

ⓒ 당시 행정구획과 지명대로 표기
이 자료에 의하면 충북에서는 최소 35회의 만세시위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료도 누락된 것이 많다. 우리 측 자료는 물론 일제 측 자료에서도 소규모 인원이 모여 단순히 만세를 외친 경우, 일제 군경이 출동하지 않고 시위 후 자진 해산한 경우, 경찰이나 헌병주재소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일제가 뒤늦게 파악한 경우 등은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3.1운동 관련 통계는 우리나 일제 측 자료 모두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것이다. 필자가 종합한 바에 의하면 도내 각 군에서 최소한 50회 이상의 만세시위가 발생했음이 확실하다.

◇ 4월 19일 제천 송학시위까지 1개월 동안 지속

충북의 3.1운동은 발발시점이나 시위규모, 전개양태 등에 있어 다른 지역보다 빠르다거나 대규모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 특징과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충북 최초의 괴산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홍명희 등 재판판결문.

첫째, 시간적으로 후발적이나 지구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만세운동의 발발은 3월 19일의 괴산장터 시위로부터 본격화하였으나, 4월 19일의 제천 송학시위까지 1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 절정기는 4월 초순이었는데, 특히 2일에는 청주·진천·괴산·음성·옥천·영동 등 거의 도내 전역에서 만세함성이 메아리쳤다.

둘째, 공간적으로 도내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충북은 10개 군이었는데 한 군데도 빠짐없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괴산 읍내·괴산 청안·영동 서산·진천 광혜원·옥천 청산 등지는 한 곳에서 2회 이상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청안에서는 3월 30일 하루에만 3차에 걸쳐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영동읍의 3.1운동기념비.

셋째, 시위양태가 매우 격렬하였다는 점이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충북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절반 이상이 현장에서 일제와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충북의 시위 군중들은 경찰관서 13, 헌병대 5, 군청과 면사무소 7, 우편소 1개소 등 26개소를 습격하여 파괴·방화하였다. 이처럼 시위양상이 격렬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넷째, 독립운동의 내재적 계승과 맥락을 명확히 실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4월 2일 진천 광혜원 시위를 주도한 윤병한(尹炳漢)은 구한국 육군 참위 출신이었고, 4월 3일 영동 학산 서산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양봉식(梁鳳植)은 제천의 이강년 휘하에서 활동한 의병 출신이다. 또한 4월 1일과 2일 내수 세교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한봉수는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 출신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인물이다. 이들은 3.1운동이 외래적 요인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라 의병에서 내재적으로 연계된 민족운동의 발전적 양상임을 입증한다.

다섯째, 봉화만세운동이라는 독특한 시위방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충북에서 이 방법을 최초로 창안한 사람은 청주 강내면 태성리에 거주하던 조동식(趙東植)이었다. 그는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려 알리는 전통을 참작하여, 3월 23일부터 3일 동안 봉화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에서 시작된 봉화만세운동은 즉각 면내와 옥산, 남일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충남과 강원까지 파급되었다.

여섯째, 20~30대의 젊은 농민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충북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피체된 인물로서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인원은 139명인데, 이들의 연령별 통계를 보면 20대가 61명(44%), 30대가 41명(29.5%)으로 전체의 3/4에 달한다. 또한 이들 중 103명(74%)의 직업이 농업이었다.

◇ 3·1운동 민족대표의 산실

충북은 3.1운동의 초기 단계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6인을 배출한 산실이다. 손병희는 운동자금을 지원하고 3대 원칙을 수립하는 등 시위 계획을 총괄 지휘하였다. 권동진은 오세창, 최린과 함께 만세시위의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권병덕은 손병희의 뜻을 받들어 주저 없이 참가하였고, 신석구·신홍식·정춘수는 기독교 목사로서 독립운동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고 참가하였다.

옥천 이원면 3.1운동기념비.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확신하였다. 이들은 우리 민족은 절대로 일제에 동화될 수 없다고 믿고, 식민지 시혜론과 근대화론을 펴는 일본인 판사와 치열한 독립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세계 개조의 신기운이 팽배한 국제정세를 예의 주시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손병희와 권동진은 물론 대부분의 민족대표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적용 범위나 한계 등에 대해 다분히 낭만적 기대와 환상적 인식을 뛰어 넘지는 못하였다.

충북 출신의 민족대표들은 동양평화론을 강조하고,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거론하며 일제가 조선을 독립시키도록 추동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들이 말한 동양평화론은 안중근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서, 이토 히로부미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다만, 이들이 지녔던 동양평화론은 동양과 서양의 대립이나, 황인종과 백인종의 대립으로 보는 동양주의적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손병희 등은 정체로서 민주공화정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정춘수는 전혀 다른 정체론을 폈다. 그는 통감부 시대와 같이 일제의 지원을 받는 민족자치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심지어 그는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낫다는 괴변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민족운동 대열로부터의 이탈을 예고하였다.

민족대표들은 당장 독립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독립을 심겠다는 파종론을 전개하였다. 그들이 자신을 희생하며 파종한 자주독립정신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아하였고 1920년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으로 만개하였다.

그러나 손병희 등은 종교 계몽주의자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우리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는 한말 이래 민족지성이 지녔던 일본관의 한계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나, 일제의 침략적 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종교를 우선시하였고, 민중을 역사 변혁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민중불신론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살벌한 일제의 무단통치를 타파하고 거족적인 3·1운동의 초기단계를 주도한 역사적 공적마저 폄훼해서는 안 된다.

/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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