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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이상설

27살에 성균관 교수이자 관장 역임 '수재형'
"을사늑약 파기하라" 고종에게 5차례 상소
헤이그 방문하자 일제 궐석으로 사형 선고
"광복 후에야 제사지내라" 48살의 짧은 생

  • 웹출고시간2015.06.21 14:38:05
  • 최종수정2015.06.22 10:18:15

이상설

[충북일보]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진천 출신으로서 한국근대사에서 뚜렷하고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한 이래, 남·북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유럽과 미주 일대까지 미치는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헤이그 사행과 구미 순방 외교를 펼쳤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13도의군·성명회·권업회·대한광복군정부·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주도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덕산 산직마을에서 태어나 서울로 출계

이상설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가난한 시골 선비 이행우와 벽진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호는 보재(溥齋)이다. 그의 선대가 진천에 세거한 것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활약한 이시발(이상설의 11대조)이 조상의 제향을 위해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어린 그에게 인생의 중대 전기가 찾아왔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상경하게 된 것이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린 그는 청년기에도 끈질긴 탐구열과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곤 하였다. 신·구학문을 겸비한 그는 1894년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와 세자시독관으로 관직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급제한 지 2년만인 27세 때 성균관 교수겸 관장이 되었으니, 그의 학문적 경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후 그는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기까지 많은 요직을 역임하였다.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1904년 6월 6일 일본 정부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를 통해 한국 정부에 '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설은 이에 분연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가장 논리정연하고 단호하게 반대하였으며 대안까지 제시한 것으로서, 이후 조야의 반대 상소를 선도하였다. 그의 국권회복운동의 서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 이상설 생가에 조성된 숭렬사.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였다. 이상설은 당시 대신회의의 실무 담당 관인 참찬으로서 당연히 회의에 참가하여야 했으나, 일제의 제지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을사늑약 강제 소식을 들은 그는 곧 사직서를 내고 황제께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는 5차례나 이어졌다. 당시 전국에서 을사늑약 파기를 요청하는 수많은 상소가 올라왔으나,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상소를 특별히 소개하였다. 그것은 황제에게 을사늑약을 반대하고 종묘사직을 위해 순사(殉社)하라고 충언한 이는 그가 유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11월 30일 아침 평리원에서 복합 상소를 마치고 종로 거리로 뛰쳐나가 군중에게 망국으로 치닫는 현실을 피를 토하듯 통곡하며 연설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상설이 연설을 마친 후 자결하기 위해 스스로 머리를 바위에 찧어 실신하였다가 한 달 만에 깨어났다고 기록하였다.

△북간도 망명과 헤이그 특사 활동

1906년 이상설은 이동녕 등 동지와 함께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왔다. 그는 첫 사업으로 정순만 등과 함께 이곳에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건립하였다. 룽징에 있던 일제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예의주시하였고, 본국에 상세한 보고를 올리며 경계하였다. 그가 민족교육에 주력한 것은 궁극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현재 룽징중학교에는 윤동주기념관과 함께 이상설기념관이 건립되어져 있다. 중국 정부가 그의 기념관 건립을 허가한 것은 그가 북간도 한인사회에 미친 영향을 인정한 결과이다.

이상설이 1906년 망명후 룽징에 건립한 최초의 민족교육 기관 서전서숙.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때 이상설은 광무황제(고종)의 특명으로 수석대표인 정사로서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대동하고 헤이그로 특파되었다. 광무황제는 특사에게 내린 위임장에서 일제에게 빼앗긴 외교권을 되찾고 열강들과의 우의를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이상설 등 특사들은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 책동으로 인해 열강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본회의 참석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상설은 6월 27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밝히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단에게 보내고 신문에도 공표하였다. 그런데 7월 14일 이준이 돌연히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이상설은 특사의 소임을 완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지를 잃고 구미 열강 순방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설의 구미 순방 외교는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분발케 하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결실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제는 1907년 8월 9일 이상설에게 헤이그 사행의 죄를 물어 궐석재판을 열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주도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승희와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접경지대인 항카호(興凱湖) 주변의 밀산부 봉밀산 일대를 독립운동 기지로서 주목하고 '한민족이 다시 흥한다'는 의미의 '한흥동(韓興洞)' 개척을 추진하였다. 그는 토지를 매입하여 한인을 이주시키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상설의 활동무대였던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이후 그는 연해주에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10년 6월 21일 이상설은 이범윤 등과 함께 노령 안에 있는 의병은 물론 국내의 의병까지 포함하는 통합군단으로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도총재에는 유인석을 추대하였고, 자신은 외교대원(外交大員)이 되었다. 이상설은 도총재 유인석과 연명하여 광무황제의 망명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망명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해 8월 23일, 그는 조국이 곧 일제에 강제 병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한인학교에서 한인대회를 열고 성명회(聲明會)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성명회는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성명회는 회원 8,624명이 서명한 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상설은 유인석·이범윤·김학만에 이어 네 번째로 서명하였다. 그러나 성명회 활동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러시아의 탄압으로 중단되었고, 그는 일시 니콜리스크로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그는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를 조직하여 의장에 추대되고,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는 등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북간도 룽징중학교에 조성된 이상설기념관(우측 흰건물, 좌측 옛 건물은 윤동주기념관).

191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여 정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는 망명과 더불어 광복군 양성 계획을 세웠고, 이미 고종의 망명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었다. 한편 1915년 3월경에는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합하여 신한혁명단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신한혁명단 동지들과 함께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고자 협의하고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밀파하여 황제와 접촉케 하고자 하였으나, 성낙형이 일제에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외국인도 격찬한 그의 인품과 학문

독립운동가인 정인보와 조완구는 이상설을 재덕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조선말기 학자 이건창은 그의 학문이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박은식과 이승희도 그의 뛰어난 학문적 경지에 존경심을 표하였다.

이상설의 시신을 화장한 수이푼강가에 세워진 유허비(2001년 건립).

그에 대한 칭송은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인 학자 관설재(管雪齋)는 이상설이 신·구학문에 모두 능통하였고 특히 수학과 법률에 조예가 깊었다고 평가하였다. 베델은 이상설을 '대한 학문의 제일류'라고 극찬하며, 그가 동서 학문에 능통하고 성리학 문장과 정치, 법률, 산술학에 학식이 풍부하였다고 하였다.

이상설의 평가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안중근의 논찬이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 29일 뤼순감옥에서 진행된 일본 경시의 제3회 심문에서 "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안중근이 당시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가장 거물급 인사인 이범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같이 평가한 것은 이상설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안중근의 이상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은 그의 지론인 동양평화론이 이상설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17년 3월 2일, 이상설은 시베리아 니콜리스크에서 향년 48세를 일기로 사거하였다. 그는 임종을 맞아 "내가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어찌 영혼인들 무슨 면목으로 고국으로 갈 수 있겠는가? 내 시체와 유품을 모두 불살라 시베리아 벌판에 뿌리고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의 시신을 화장한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는 2001년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세운 '이상설선생유허지' 비석이 서 있다. 이 비석은 발해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에 외로이 서서 무심히 휘돌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박걸순(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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