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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곽재기

"육혈포와 폭탄만이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
청주 오송서 태어나…젊은 시절 한때 교사 생활
3.1운동 실패하자 "평화로는 독립 쟁취 어렵다"
권총·폭탄 국내에 들여와…조선총독 처단 시도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피난지에서 불귀의 객

  • 웹출고시간2015.04.26 14:37:44
  • 최종수정2015.04.26 14:37:58
[충북일보] 곽재기(郭在驥, 1893-1952)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 비밀리에 권총과 폭탄을 국내로 들여와 조선 총독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을 무력적 방법으로 파괴하려는 이른바 '밀양폭파사건'의 주도자로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곽재기 의사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다

곽재기는 1893년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 상봉리(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 75번지에서 아버지 곽신엽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현풍, 자는 경(敬)이며, 이명으로 김광삼(金光三)과 김재만(金在萬)을 사용하였다.

그는 백부인 곽지엽에게 입양되어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의 경신학교 졸업 여부는 명부가 소실되어 확인되지 않으나,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이곳에서 김규식, 안창호 등에게 철저한 민족의식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0년대의 청남학교 학생들과 교사.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향한 곽재기는 1907년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청남학교는 청주지역 유지인 방홍근, 김태희, 김원배 등이 1904년 광남학교(廣南學校)로 개교하였다가 청남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었다. 그의 부임을 전후하여 청남학교는 학부의 설립인가를 받았고, 미국인 선교사 민노아(閔老雅)가 학교를 경영하였다. 청남학교는 서구문명의 새로운 지식기술과 개화사상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이를테면 충북지역의 민족교육의 실천장이었다.

곽재기 생가(청주시 오송읍 상봉리 75번지) 마을 입구.

이곳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곽재기는 1909년에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대동청년단은 서상일, 남형우 등 영남지방과 신민회 계열의 청년 인사 80여명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는데, 충북 출신으로는 그를 비롯하여 신채호·신백우·민강·김태희·신팔균 등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재기는 동지들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피체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3·1운동과 같은 평화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즉,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독립만세를 고창 등의 방법은 입과 붓으로만 구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독립은 육혈포와 폭탄 등 무기를 사용하여 피로써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곽재기는 "지금 우리들이 장차 독립을 바란다면 중국으로 가서 도모하는 편이 훨씬 낫다"라고 결심하고 이해 7월, 대동청년단 동지인 황상규·윤소룡·김기득 등과 새로운 독립운동의 장소를 찾아 만주로 떠났다.

의열단 단원이 되다

주 길림성 동녕현에 도착한 곽재기는 길림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원봉을 만났다. 이때 김원봉은 "지금 세 가지 할 일이 있다. 하나는 단체를 조직하고 마땅히 의열단이라 칭하는 일이요, 또 하나는 상해 임시정부 안창호 명령에 따라 길림에서 폭탄제조기를 가져오는 일이요, 또 하나는 박용만, 안창호 등의 요구에 응하여 그 폭탄을 보내는 일이다. 우리가 세 가지 목적을 실행하려면 한 달 안에 폭탄을 휴대하고 모두 조선으로 들어가 파괴하고 암살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그는 김원봉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11월 10일 의열단이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의열단원이 되었다.

의열단 창당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독립기념관 소장).

의열단은 활동지침으로 '공약 10조', '암살대상', '파괴대상'을 채택하고, 일제 침략기관 파괴와 침략 원흉 응징을 활동목표로 정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 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 쟁취를 목표로 분명히 내세운 것이었다.

의열단은 "우리 단이 노리는 것은 동경, 경성 두 곳으로서 우선 조선 총독을 계속해서 5, 6명을 죽이면,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동경 시민들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조선 독립 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 국민 스스로가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라고 하였다. 요컨대 의열단은 조선 총독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며,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매일신보 등 핵심 식민지 통치기구를 폭파 목표로 설정한 것이었다. 이의 실행을 위한 방법으로는 '폭탄 제조 및 투척'으로 정했다.

그는 동지들과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김원봉과 강세우 등은 상해에서 북경을 오가며 후방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곽재기는 이성우·황상규·윤치영 등과 폭탄을 구입하고, 배중세·김상옥·고인덕 등은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여 투척하기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곽재기는 김원봉, 이성우 등과 1919년 11월 하순 길림에서 상해로 가서 폭탄 3개와 탄피 제조기 1대를 구입하여 우체국을 통해 안동현으로 발송했다. 이 폭탄을 인수한 곽재기는 고량미 가마니 속에 폭탄을 넣어 곡식으로 위장하여 국내 경남 밀양에 거주하는 김병환에게 보냈다.

그런데 의열단은 폭탄 3개로는 부족하다고 여기고 다시 상해로 가서 프랑스 조계 오흥리에 거주하는 중국인 탄약상에게 폭탄 13개와 미국제 권총 2정을 더 구입하여 안동현 이병철을 통해 창원 진영리 미곡상회 주인 강원석에게 보내 두었다.

국내에서의 거사 계획 추진

거사 준비를 끝낸 곽재기는 결행을 위해 비밀리에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는 거사 지휘소를 서울 궁평동 전동여관으로 정하고 지방을 순회하며 계획을 점검했다. 1920년 3월, 밀양의 장석봉의 별채로 가서 한봉근과 이병철을 만난 그는 폭탄이 이미 밀양읍 김병환의 집에 도착하였고, 폭탄을 투척할 자로 한봉근, 윤소룡, 신우동 등이 선정되었음을 알고, 이수택에게 김병환의 집에 가서 폭탄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폭탄을 투척할 곳이 경성이었기 때문에 여비 문제로 인하여 마침내 중지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부산에서 배중세와 윤치형을 만나서 방법을 의논하였다. 4월 상경한 그는, 인사동으로 가서 윤소룡·이성우·신우동·사상락·황상규 등을 만나 서로 돕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수택이 또 발병하여 계획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6월에 부산으로 가 배중세가 영주동 정만기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폭탄 13개와 권총, 탄환 등을 비밀리에 창원, 진영역으로 보내 강원식으로 하여금 무점리 강상철 집에 숨겨 놓게 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 김기득이 부산으로 와 이수택에게 "윤소룡, 이성우 둘 다 체포되었으니 그대가 폭탄을 내게 주고 계획을 변경하기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이수택이 듣지 않아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의열단은 남은 13개의 폭탄으로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거사 때 뿌릴 격문이 마련되지 못했고, 일제가 비상경계망을 펼치면서 폭탄의 서울 진입이 늦어졌다.

피체와 이후 활동

계획의 실행이 지체되는 사이, 곽재기와 동지들의 투탄계획은 경기도 제3경찰부의 밀정에게 탐지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는 5월 8일 밀양 김병환의 집을 급습하여 폭탄 3개를 압수하고, 6월 16일 서울 인사동에서 경기도경의 경찰들에게 윤세주를 비롯한 의열단원을 체포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로 검거 선풍이 확대되었고, 결국 곽재기는 부산 복성여관에서 체포되었다. 이로써 조선 총독을 처단하고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을 폭파하려던 의열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곽재기 등 의열단의 재판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 6. 21).

곽재기는 피체 이후 재판 과정에서도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을 당시의 신문에서는 "곽재기는 시종일관 흰색 두루마기에 금테 안경을 쓰고 항상 벙글벙글 웃으며 재판을 받았다"라고 보도하였다. 그는 1년에 걸친 혹독한 심문과 조사를 받았고, 결국 1921년 6월 21일 정치범 및 폭발물취체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언도받았다. 곽재기는 경성감옥 마포 유치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1월 22일 감형으로 출옥하였다.

곽재기 출옥 광경이다. 좌로부터 부친, 아들, 곽재기, 모친. 동아일보 1927년 1월 23일자.

출옥 후 곽재기는 충남 연기군 서면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곳에서도 그의 민족운동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32년 서면지역 청년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반제격문 살포사건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방면되었다.

곽재기는 오랫동안의 투옥생활로 인한 정신이상 등으로 심각한 생활에 갈등을 겪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활동지를 찾아 다시 만주·상해·노령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해방이 되자, 그해 11월 국내에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한국에스페란토어학회를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던 중 1952년 1월 10일 전쟁의 와중에서 피난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장승순: 문학박사·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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