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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규식

'흘긴 눈'으로 독립된 조국을 꿈꾸다!
'까만 선글라스' 사실은 음독 기도의 후유증
부친부터 외손녀까지 4대에 걸친 민족 운동
독립 무산되자 정부!정부! 외치며 43살 절명

  • 웹출고시간2015.04.19 17:20:12
  • 최종수정2015.04.20 09:40:41
[충북일보]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은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쑨원 등 중국혁명인사들과 함께 신해혁명에 가담하고 그곳에 한국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한 인물이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동생 신건식, 조카 신형호와 신순호, 사위 민필호, 외손녀 민영주의 독립운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친 신용우의 의병활동을 포함하면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민족운동을 이어간 민족혼의 본산이라 할 수 있다. 유작으로는 『한국혼』과 시집 「아목루(兒目淚)」 등이 있다.

까만 색안경에 카이젤 수염을 한 멋쟁이 신사

신규식.

카이젤 구레나룻과 멋진 콧수염을 하고 까만 선글라스를 낀 신규식은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멋쟁이다. 그러나 그의 까만 색안경 속에는 망국의 슬픔을 흘겨볼 수 밖에 없었던 깊은 통한이 서려있다. 신규식은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그들 문중만을 별도로 '산동신씨'라고 부를 만큼 오랫동안 고령신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내려오는 곳이다. 신규식은 어려서부터 영민해 신채호·신백우와 더불어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는 1896년경 서울로 올라가 관립한어학교를 다녔으며, 1900년에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육군무관학교는 근대적 고급장교 양성학교로 입학 조건이 까다로워 지배층 관료 자제들이 아니면 입학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신규식이 무관학교에 입학했던 이유는 일찍부터 군사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을미의병 당시 16세의 나이로 소년 의병단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는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 자결을 시도했다. 이때 한쪽 눈의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되어 그때부터 흘겨보는 듯한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해산령을 내리자, 해산식에서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육군 부위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는 서울에서 생활하는 동안 독립협회·대한자강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고향에도 학교를 지어 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매사에 의욕적인 그였지만 침탈당하는 조국의 모습은 번번이 삶의 의욕을 앗아갔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제일 먼저 홍범식 금산군수가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하였다. 신규식도 그 뜻을 이어 또 한 번 자결을 시도했는데 때마침 그를 방문했던 나철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망가진 눈을 호로 삼아 '예관(目+兒觀 흘겨본다)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신해혁명의 중심으로 뛰어들다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는 서구열강의 조계지가 되면서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1910년 전까지만 해도 상하이는 정착한 한인이 거의 없었던 한국독립운동의 불모지였다.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좀 더 접근하기 수월하고 한인들이 많이 정착해있는 만주나 연해주지역을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반면, 신규식은 중국 남쪽에서 들끓는 혁명의 소식과 국제화된 상하이의 기운이 장차 한국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11년 봄, 그는 상하이로 망명해 신정(申檉)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 먼저 혁명가 쑹자오런(宋敎仁)이 주필을 맡은 《민립보(民立報)》의 사원 쉬티엔푸(徐天復)와 교유관계를 맺고 이를 계기로 신해혁명을 준비하던 '중국혁명동맹회'에도 가입했다. 그는 신해혁명의 주역인 쑹자오런·황씽(黃興)·천치메이(陳其美)에게까지 친분을 넓히며 중국혁명동맹회 회원으로서 신해혁명에 당당하게 동참하였다.

상하이를 한국독립운동의 심장으로 만들다

우로부터 신규식, 신석우, 신채호.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속속 모여들었다. 다음 과제는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1912년 신규식은 박은식·신채호·홍명희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위해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라는 한·중 연대 비밀결사도 조직했다. 그 결과 많은 유학생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고 그해 말에는 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박달학원'을 설립했다.

그의 노력으로 상하이는 점점 한국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쑹자오런과 천치메이 등이 위안스카이에 의해 차례로 암살되었다. 그 역시 심한 감시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중국혁명인사들과 더욱 단단하게 유대관계를 다져나갔다.

1914년 발칸반도를 둘러싼 유럽의 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산되었다. 1차 대전의 전세를 관망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신규식은 박은식 등과 더불어 신한혁명당·대동보국단·신한청년당 등의 청년단체를 조직하며 독립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그가 조직한 단체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임시정부 대표로서 외교활동의 전면에 나서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거국적인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9월 11일 이들을 통합하여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통합 임시정부는 출범과 함께 독립운동의 노선대립으로 갈등과 분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은 '외교독립론'이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1차 대전의 종전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독립 청원은 시도부터 좌절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철저하게 승전국들의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제회의였을 뿐이었다.

신규식이 활동한 1920년대의 상하이 와이탄 원경.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노선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깊은 불신을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을 향한 불만이 갈수록 고조되자, 1920년 말 이승만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계파간의 골만 더욱 깊어져 이동휘·안창호 등이 임시정부에서 탈퇴했고, 1921년에는 이동녕마저도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러나 신규식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끝까지 지지했다. 그는 망명 초부터 독립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공조나 연대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느꼈다. 또한, 국제적 연대의 구심점이 될 임시정부가 반드시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그해 5월 전권을 신규식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의 상하이 방문 환영식(1920. 12. 18), 우측 두번째가 신규식, 중앙에 꽃다발을 건 사람이 이승만이다.

신규식은 국무총리대리 겸 법무총장 겸 외무총장이면서 대통령직까지 대행하게 되었다. 애초 이승만이 상하이를 방문했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이승만은 머지않아 워싱턴에서 개최될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자신의 외교독립론을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한국의 독립 청원은 물론, 자신을 향한 불신도 일시에 해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중국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승만은 중국혁명인사들과 유대가 깊은 신규식과 이러한 역할 분담을 상의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다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기념촬영(대한민국3년1월1일). 두번째줄 좌측 4번째가 신규식.

1921년 10월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광둥 호법정부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그를 돕기 위해 한·중 연대조직인 '중한호조사'가 결성되었다. 광저우에서도 광둥정부의 국회의원들이 다수 포함된 '중한협회'가 형성되어 그의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신규식은 호법정부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호법정부는 그를 공식적인 한국특사의 예로써 성대하게 맞이했다. >

신규식이 1921년 미국인 콘스탄틴 대위에게 기증한 태극기이다, 독립기념관 소장.

쑨원은 신규식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승인함은 물론, 여러 가지 원조까지 약속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로서 광동정부 북벌서사 전례식에도 참석했다. 임시정부가 참가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얻었다는 것은 그만큼 워싱턴회의에서 우리의 독립 청원을 발언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규식의 광둥행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외교독립론의 운동가들은 곧 우리의 독립이 이루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임시정부와 삼천만 동포를 위해 전력해 달라'

신규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워싱턴회의에서의 독립 청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은 쑨원의 호법정부가 아닌, 위안스카이의 베이징정부를 중국의 정통 중앙정부로 인정했다. 신규식은 임시정부의 모든 직임에서 사퇴했고, 임시정부의 분열을 자책하며 극심한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느 날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임시정부와 삼천만 동포를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고는 일체의 음식은 물론 대화조차 거부했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단식 끝에 그는 '정부! 정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1922년 9월 25일(43세) 상하이의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냉정한 국제사회와 외교독립노선의 좌절이 또 한 번 그를 자결과도 같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 김건실(충청대 강사·충북대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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