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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동진

조국의 독립과 통일국가 건설을 꿈꾼 애국애족의 삶
괴산 소수면 출신…사관학교 1기생으로 수석졸업
망명지 일본서 손병희 만나면서 인생 항로 바뀌어
인내천 사상에 감복 천도교 입교… 개화운동 주도
85세 고령으로 반탁운동 전개… 신한민족당 창당

  • 웹출고시간2015.03.08 16:14:46
  • 최종수정2015.03.15 17:11:08

일본에 망명중인 권동진(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그 오른쪽이 손병희, 1904).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손병희·오세창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1882년 군인으로 처음 관직에 발을 들인 이후 천도교와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해방 때까지 평생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애국애족의 삶을 살았다.

일본 망명과 천도교 입교

권동진.

권동진은 1861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아버지 대에 괴산으로 이거했고, 그는 괴산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라서는 포천 출생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그가 여덟 살이던 1869년, 집안이 서울 재동으로 이사하였으며, 서울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권동진이 19세 되던 1880년,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무관 집안 출생인 권동진은 그곳에서 남다른 열성을 보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다른 무관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 번을 들어가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후 육군참령이 되어 별군직을 맡았고, 함안군수와 거문도 참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895년에 발생한 을미사변은 권동진의 생애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새로이 조직을 개편한 훈련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형인 권형진이 제2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권형진이 1895년 8월 대원군의 '명성황후폐위' 거사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이때 권동진도 여기에 함께 했다. 이들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음모와는 관계없이 명성황후를 폐위하려는 대원군의 획책에 동원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실패했고, 이 일로 권동진은 1895년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권동진은 도쿄에 머물면서 근위사단에서 병학을 공부하며 군사실습을 받았고, 육군성에서 경리사무를 익히기도 했다. 또한 그곳에서 일본으로 망명해 온 박영효·조희연·장박·유길준 등과 교류하였다.

1900년, 권동진은 거주지를 오사카로 옮기면서 망명해 온 손병희를 만났다. 손병희와의 만남은 그의 행로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손병희는 문명개화를 통하여 동학의 전기를 마련하려 하였고, 권동진은 동학의 세력에 힘입어 정권을 되찾고 정치적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였다. 권동진은 손병희와의 만남을 통해서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감복하고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 권동진은 손병희, 이용구 등 동학지도자들과 함께 진보회란 정치단체를 만들어 동학을 포교하면서 정부를 개혁하려 한 이른바 '갑진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귀국 때까지 그는 손병희와 굳게 결합하여 민족의 장래와 천도교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의 민족운동 전개

권동진은 1906년 1월 귀국하였다. 11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손병희 등과 함께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는 오세창 등과 교우구락부를 세우고, 교세 확장에 힘을 쏟아 이용구, 송병준 등으로 넘어간 교세를 다시 회복하였다. 그는 손병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주요한 직책을 맡으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대한협회회보에 실린 권동진의 글.

1906년 5월, 그는 박문사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인수하여 보문관을 설립하여 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권동진이 추진한 계몽운동에서 주목할 것은 대한협회 활동이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7년 11월 설립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을 주지로 국민계몽을 전개한 계몽운동단체였다. 권동진은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한 부국강병에 힘썼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은 끝내 멸망했다. 근대화를 위해 계몽운동을 펼치던 권동진에게 독립운동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것이다. 권동진은 해외 망명을 통한 독립운동과, 국내에 머물며 천도교를 통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고민하였다. 결국 당시 천도교 중책을 맡고 있던 그는 천도교 포교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권동진은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세계가 개조되는 상황을 목격하였다. 그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선언을 보며, 민족자결주의를 세계적 대세로 인식하였다. 그는 이 같은 국제정세의 변동을 우리나라 독립의 좋은 조건과 기회로 여겼다.

1918년 12월, 그는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원로인 오세창과 수차례 만나 세계의 정세를 논하고, 곧 경성보성고보 교장인 최린의 동의도 구하였다. 이어 이듬해 1월 하순, 그는 손병희를 방문하여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신명을 다해 조국을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들은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3·1운동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독립선언식 직후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피체되었다. 그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했다.

불굴의 민족운동

청주 3.1공원에 조성된 권동진 선생 동상.

1920년대 민족운동 진영에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자유주의 진영과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때 권동진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권동진은 사회주의야 말로 모든 주의 중에서 인류애가 가장 이상적인 사상이라고 여겼다. 그는 사회주의만이 인류를 위한 진리, 복리에 기반하고, 천부의 평등 자유를 지향하는 인류주의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류주의는 무형의 진리로 종교와 도덕이 있고, 유형의 진리로 사회주의가 있는데 무형의 진리인 종교와 도덕은 정치적 수단으로 타락한 일도 있지만, 사회주의는 금권 만능주의의 해독을 지닌 사회조직의 결함을 개조할 수 있는 선견이라고 생각하였다. 곧 사회주의는 그 해독을 제거하고 인류의 꽃다운 이상향을 건설하는 인류의 최고 이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권동진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한 인류애에, 사회주의의 인류주의를 포용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구심점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했다. 손병희 이후 4대 교주 박인호의 계승 문제에서 비롯된 분열은 이른바 신파인 최린과 구파인 권동진과 이종린 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종교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에서도 대립하였다. 최린은 자치론에 기울고 있었고 권동진 등은 자치론에 반대하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1926년, 권동진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며 6·10만세운동 추진하였다. 6·10만세운동 당시 천도교 지도부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박래원을 앞세워 6·10만세운동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천도교가 6·10만세운동에서 맡았던 역할은 격문 인쇄와 지방 조직과의 연락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은 정치, 사회사상의 이념을 초월한 민족운동으로 파급력이 큰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여파는 민족유일당운동으로서 좌우 합작의 신간회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권동진·이종린·박래홍 등이 중심이 되어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권동진은 창립 당시 신간회 본부 부회장을 맡았고, 1929년에는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신간회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 이 운동을 대대적인 민족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 민중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민중대회 당일인 12월 13일, 권동진은 대중을 대상으로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사전 탄압으로 인해 대회는 무산되었고, 그는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또 다시 감옥에 갇혔다. 당시 70세의 노령이었던 권동진의 건강은 매우 쇠약해졌고, 1930년 1월 출옥했다. 출옥 후에도 그는 신간회운동에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일선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런데 신간회를 해소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그는 신간회의 해소를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1931년 5월 신간회는 끝내 해소되고 말았다.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고 중일전쟁을 도발하며 민족운동을 강하게 탄압한 시기였다. 이 시기, 그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 공세에도 흔들림 없이 민족적 지조를 지켜나갔다.

건국운동에 헌신

임시정부 연합군 환영준비 취지서(1945.8). 권동진이 위원장으로 되어 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먼저 그는 조국 광복을 위해 해외에서 활동하던 임정요인의 환국을 환영하는 대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85세를 넘긴 고령이었으나, 권동진은 민족통일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연합국들에 의한 신탁통치의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또한 정치권이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계속 대립하는 분열 상태를 보이자, 그는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 민족적 총의와 총력을 집중할 것"을 목적으로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여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온 힘을 쏟고자 하였다. 그러나 1947년 3월 9일, 그는 8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고, 장례는 천도교당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치러졌다.

권동진은 20세에 무관으로 관직에 진출하였고,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과 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삶은 오직 조국과 민족의 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애국애족의 외길 인생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장승순(문학박사·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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