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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손병희

서자 출신으로 신분 차별에 단호히 맞서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 과감히 출교처분
대표답게 '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서명
수감생활 중 병세악화… 가출옥 후 사망

  • 웹출고시간2015.03.01 18:35:04
  • 최종수정2015.03.01 18:35:04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

3. 손병희

의암 손병희

손병희(孫秉熙, 호는 義菴, 1861. 4. 8 ~ 1922. 5. 19)는 충북출신의 독립유공자 중에서 건국훈장의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그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가운데 대표였고, 동학농민혁명·개화운동·교육사업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이다.

◇ 청주에서 온 상놈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서자에 대한 신분적인 차별로 손병희는 일찍 과거를 단념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생활이 일시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있으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손병희는 의기로서 신분 차별에 맞서게 되었고, 여러 일화를 남겼다.

손병희 생가 전경

ⓒ 독립기념관
그가 남긴 일화 중에 하나는 1876년 9월 손씨 문중의 제사에서 일어났다. 성인이 된 모든 자손들이 의관을 갖추고 제례에 참여하는 제사에 혼인을 한 손병희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복형들이 그의 제사 참석을 서자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에 격분한 그는 '아버지의 뼈만이라도 일부 가지고 따로 산소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였다. 이복형들은 놀라서 그의 아버지 제사 참석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손병희는 서자에 대한 문중의 차별을 극복하였다.

다른 일화는 초정약수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다.『동국여지승람』·『조선왕조실록』등에도 기록될 만큼 유명했던 이 약수터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1881년 7월 초정에 약수를 마시러 갔던 손병희는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지 못하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이유인즉 강원도 영월군수를 지냈다는 송월령과 평안남도 숙천군수를 지냈다는 변숙천이 약수터를 독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를 본 손병희는 두 사람에게 약수터에서도 양반과 상놈의 차별이 있냐며 큰 소리로 꾸짖고, 약수를 떠서 마신 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약수를 돌렸다. 또한 그는 송월령과 변숙천에게 자신을 '청주에서 온 상놈'이라고 소개하며, 「초정약수령(椒井藥水·)」 한수를 지어 이들을 농락했다고 한다.

'비록 가시나무라 이름 지어도 핀 꽃은 아름답고(雖云芒木發花佳) / 더러운 못에 연꽃일지라도 향기는 더욱 좋더라(蕩地蓮花尤香好) / 예와 지금 양반과 상놈이 무엇이 다름이 있으랴(古今班常何有別) / 초정에 마음을 씻으니 사람은 평등하더라(椒井洗心平等人)'

손병희는 상대가 문중의 어른이나 양반일지라도 신분차별에 대해 분노하며, 당당히 맞섰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 신분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철폐는 그에게 반드시 타도해야 할 과제이자 숙명이 되었다.

◇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동학 입도

손병희는 1882년 7살 연상 조카인 손천민의 권유에 의해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사상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신분차별에 크게 좌절하였던 손병희에게 동학은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 손병희는 동학에 입도하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수행에 열중하였다.

손병희 서울 집터 표시석

ⓒ 독립기념관
1892년 손병희는 교단 지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1월, 그는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으로 변장하여, 서울 광화문 앞에서 박광호·손천민·박인호 등과 함께 교조의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손병희를 포함한 지도부는 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모이도록 하여 '보국안민'과 '척왜척양' 을 주장하며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가 되어, 충청도 일대 동학교인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894년 전봉준이 동학 남접 산하의 교도들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교주 최시형의 뜻에 따르는 손병희를 비롯한 북접은 이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은 남접과 북접을 가리지 않고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북접의 교인들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여, 동참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북접농민군의 수장인 통령에 임명되어 농민군을 이끌고 논산에서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류하게 되었다.

우금치 전투 기록화

ⓒ 독립기념관
그러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손병희와 북접농민군은 충주 외서촌으로 후퇴하였다. 그는 사기가 떨어진 북접농민군을 해산시키고, 일부 교단 지도부와 함께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로 피신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 교단은 존립이 위태로웠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손병희는 동생 병흠과 함께 관서 지역의 개항장 부근이나 국경 근처의 상업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동학의 교세를 다시 확장시켜 나갔다. 그리고 1898년 최시형이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자, 그 뒤를 이어 제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어 나갔다.

◇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고

교주가 된 손병희는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있던 이종일, 개화파 인사였던 양한묵·장효근 등을 동학에 가입시켜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였다.

1901년 손병희는 세계의 대세를 파악하기 위해 일찍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을 여행하였다. 일본에서 그는 오세창·권동진 등을 동학에 입교시키는데, 이들은 3·1운동 민족대표가 된다. 이처럼 손병희는 일본에 있었던 시기부터 훗날 3·1운동에 참가하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1904년 8월 전국에 진보회를 결성한 후, 단발을 시행하고 흑의(개화복)를 입게 계몽하는 등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민회를 조직하여 근대국민국가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시로 진보회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용구가 개인적인 이권을 위하여 친일단체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통합시킴으로써 실패하게 되었다. 더욱이 진보회가 일진회와 통합되면서, 동학 자체가 친일단체로 매도당하게 되었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하였다. 이어 1906년 이용구 등 62명을 출교 처분하였고, 천도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할 것을 지시하였다.

손병희 등의 기소장. 처음에는 내란죄로 기소했으나 파장을 우려하여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변경했다.

ⓒ 독립기념관
손병희는 근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는 중에도 젊은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 교육을 받게 하였다. 또한 1910년에는 재정난에 빠진 보성학원을, 1912년에는 동덕여학교를 인수하였다. 그밖에 지방의 7, 8개 학교를 직접 관할하는 등 교육 사업에 힘썼다.


한편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를 구입하여 입국 후에 박문사를 설립,『만세보』라는 신문을 발행하였다. 1910년 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천도교월보』와 학교 교과서 등을 간행하였다.

◇ 3·1운동의 기획자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여 천도교 측에서는 일제 강점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이에 일제는 손병희를 헌병대에 소환하고 천도교 간부들을 체포하였으며, 천도교의 재원인 성미법을 폐지하려고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손병희는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도교의 조직을 정비·강화하고, 천도구국단 등 여러 개의 비밀결사를 만들어 조국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는 등 독립운동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또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8독립선언'은 국내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의 3대 원칙을 마련하였다.

손병희는 이 3대 원칙을 기준으로 기독교·불교 측과 연합을 성사시켜 3·1운동을 추진하였다. 3·1운동의 상징인 「독립선언서」에 그가 제일 먼저 서명한 것은 3·1운동 추진과정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손병희는 독립선언서의 서명 날인 및 인쇄를 마친 후 1919년 2월 28일 밤 가회동 자택에서 민족대표 23인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내일 있을 3·1운동을 재확인하고, 성공을 결의하였다.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상단 가운데가 손병희.

ⓒ 독립기념관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 당하였다. 3·1운동 직후 여러 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그 중 대한국민의회(노령), 조선민국임시정부(서울), 대한민간정부(기호), 임시대한공화정부(간도)에서 손병희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이 사실을 통해 3·1운동 직후 손병희의 정치적 영향력과 위상을 알 수 있다.

손병희는 연행 후 보안법과 출판물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병세가 악화되어 1920년 10월 30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이후 상춘원에서 요양하던 중 1922년 5월 19일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향년 62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 홍일교 독립기념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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