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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순명

제천 의병정신 계승…후기의병으로 봉기하다"
태어난 장담마을 한말 의병운동의 발상지
유인석의 위정척사사상 영향 강하게 받아
군자금 모의다가 횡성서 피체 '15년 옥고'
남은 것 재판기록 전부, 묘소·후손도 불명

  • 웹출고시간2015.05.03 18:50:39
  • 최종수정2015.05.03 18:50:39

권순명의 생가 터(충북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 현재 자양영당과 제천의병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

[충북일보]권순명(權順明, 1876~미상)은 충북 제천 사람으로 후기의병에 참여하여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908년 10월 김춘쇠(金春釗) 의진에 참여하는 것으로 의병전쟁에 참전하여 1년 2개월 동안 6백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가평과 강원도 홍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직접 교전을 벌이는 등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 의병의 본향 제천 장담에서 태어나다

권순명은 1876년 충북 제천군 근좌면 장담리(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에서 태어나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제천 장담마을은 한말 의병운동의 발상지였다. 한말 의병사에서 제천은 그 중심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천을 '의향(義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서 연원한다. 제천이 의병의 발상지이자 중심지가 된 까닭은 바로 제천 장담

마을에 화서학파의 정맥을 이은 유중교가 살고 있었고, 스승을 찾아 온 그의 제자 유인석이 한 때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위정척사와 존화양이의 학문 세계를 철저히 존중하였던 이항로를 연원으로 한 화서학파는 전기의병을 이끌어 나갔다. 화서학파는 서세동점과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정통 성리학적 입장에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의병으로 일어선 것이었다.

이항로의 학통을 계승한 유중교는 1889년 가을 제천 장담으로 이사해 왔다. 그는 이곳에서 자양서사(紫陽書舍, 현재의 자양영당)를 열어 상·하인을 망라한 마을계를 조직하고, 주자·송시열·이항로의 학문을 계승하는 강회(講會)를 끊이지 않고 행하였다. 그러나 1893년 봄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 유인석(1842~1915)이 화서학파의 수장으로서 사우들을 이끌게 되었다.

일제에 피체된 후기의병 포로.

유인석은 변복령이 내려진 직후에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이러한 '변란'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자 1895년 6월 24일 원근의 문인사우를 장담으로 모았다. 주용규와 서상렬이 주도하여 사군지역(제천·청풍·단양·영춘)의 사우들을 불러 모아, 첫날에는 대강례를 하고 둘째 날에 향음례를 행하였다. 당시의 광경을 기록한 『장담강록(長潭講錄)』에 의하면 사군지역에서 대강례에는 61명이, 향음례에는 128명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향음례(鄕飮禮, 또는 鄕飮酒禮)란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에 근거한 것인데, 이는 단순히 향촌사회의 사족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상하간의 엄숙한 질서를 재확인하고 일체감을 재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따라서 이때에 행하여진 향음례란 그들이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겪은 충격에 대한 보수적 저항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인석은 사변에 대처하는 방안을 논의하였으니, 이는 곧 '변란에 대처하는 세 가지 방법인 처변삼사(處變三事)'였다.

그 첫 번째는 의병을 일으켜 일제를 축출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이며, 둘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대의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이며, 셋째는 죽음으로 의리를 지키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행동 방안은 장차 유인석이 항일의병을 전개해가는 데 그 준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 수구파 지식인과 선비들의 처신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권순명은 제천 장담의 자양사서 근처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유인석의 위정척사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들이 봉기한 전기의병과 중기의병으로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는 광경을 그 중심지에서 목도하며, 자신이 직접 의병으로 나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권순명의 사례에서 한 사람의 태생적 배경이 그의 사상과 행위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 후기의병에 뛰어들다

1907년 8월 1일, 일제가 한국군대를 강제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항일투쟁을 벌였다. 해산된 군인의 항전은 서울의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강화·홍주·진주진위대로 확대되었다. 수많은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1907년 11월경, 전국 연합 의병인 13도창의군이 결성되었다. 서울 수복을 목표로 1908년 1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 수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격전은 쇠약해가는 의병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의병항쟁을 국제법상 전쟁의 단계로 발전시켰으며, 한민족의 항일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권순명 재판판결문(1910년 3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권순명은 후기의병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던 1908년 8월, 35세의 나이로 김춘쇠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의병활동을 시작한 1908년은 일제가 1907년 겨울 이래로 의병의 회유책에 중점을 두다가, 1908년 5월부터 강경책으로 선회하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던 시기였다. 강경책이란 곧 무력진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군무국장을 한국에 파견시켜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하세가와 조선주차군 사령관 등과 협의하여 1908년 말 일본군을 동원하여 의병을 진압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일제는 의병을 학살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할 것임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후에도 일제는 군대와 헌병 및 경찰력을 계속 한국에 보내 무력을 증강시켰다.

권순명은 일제가 대대적으로 의병 탄압에 나선 상황 속에서도 김춘쇠 의병장의 지휘 아래 600여 명의 동지와 함께 경기도 양주와 가평,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면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교전하는 등 활발한 투쟁을 벌였다. 1908년 9월 30일, 그는 강원도 홍천군 남천리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김춘쇠 의병장 등 30여 명의 의병 동지가 전사하여 의진이 붕괴되다시피 하였고, 그는 일시 몸을 피해 재기를 도모하였다.

◇ 훈장조차 찾아가지 못한 독립운동가

일본군은 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한국병합의 큰 장애물인 의병을 속히 종식시킬 목적으로 1909년 9∼10월에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개시하여 호남의병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후기 의병에서 일본 측 자료로 확인 가능한 희생자만도 2만여 명에 이른다.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으로 피체된 의병들.

권순명은 의진이 붕괴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일층 악화되는 상황에도 잔존 의병들과 함께 항전을 지속하여 갔다. 그러던 1909년 10월 30일, 김한경(金漢京) 등 의병 동지들과 함께 강원도 횡성군 오원리 부근에서 군자금품을 수합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가 끝내 피체되고 말았다. 결국 1910년 3월 23일, 그는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폭행 및 강도라는 죄명으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권순명의 의병활동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의병장이나 양반유생으로서 의병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일개 농민으로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다는 사실이다. 정작 나라를 망하게 한 양반 유생들이 그 한 몸 보신에 급급하였으나, 그는 나라에 목숨을 내걸 의무가 없었으나 스스로 고난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병정신인 것이다.

권순명은 일제와 전투를 치르고 피체되어 15년의 옥고를 치렀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일제의 재판 기록 이외에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망사실조차도 확인되지 않아 그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광복 50주년인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러나 후손을 찾지 못해 그의 영예로운 훈장은 국가보훈처에 그대로 보관되고 있는 실정이다. 권순명처럼 국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았지만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찾아가지 못한 독립운동가가 충북에만도 6명에 달하고 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사실로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권순명은 후기의병이지만, 본고는 상당 부분을 제천의 전기의병 상황을 서술하는 데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순된 서술이란 사실을 필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짧고 간략한 일제의 재판판결문이 자료의 전부인 권순명을 독자 주제로 기술하는 데에는 애로와 한계가 있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한다. 권순명 외에도 그런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후손으로서 또한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송구스런 일이다.

/ 강은구(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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