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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독립을 이뤄낸 영웅들의 발자취를 되밟다
본보, 광복 70주년맞아 도내언론 최초로 1년 장기연재
올초 현재 충북출신 독립운동가는 4백33명 전체 3.3%
숫자 적은 편이나 다른 지역과 달리 다양한 분야 활동
눈멀고 부녀지간, 그리고 '3만'까지 이색 운동가 많아

  • 웹출고시간2015.02.17 16:40:29
  • 최종수정2015.02.17 16:40:29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

1. 충북의 독립운동가

올해는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시해와 을미의병 발발 120주년이 되며, 일제에게 자주권을 강탈당한 을사조약이 강제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올 한해는 한국근현대사의 굴곡과 명암을 조명하고 평가하는 논의의 장이 활기를 띨 것으로 생각한다. 이미 몇몇 중앙지는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를 시작하여 담론을 생산하고 그 역사적 공과와 시비를 따지고 있다. 다행히 충북지역에서는 충북일보가 그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연재를 기획하였다.

충북의 지역 일간지에서 이처럼 거대한 주제로 장기 연재를 기획한 것은 최초의 일이다. 어떤 주제를 선택할 것인지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다루기로 하였다. 역사를 읽는 방법 중 인물사를 읽는 것은 무척이나 역동적이고 흥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근현대사를 살다간 인물의 궤적을 더듬는 것은, 격동의 순간을 현장처럼 감동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그 가운데에서도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사상, 고뇌와 사색은 우리들에게 미래의 삶의 좌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들의 치열했던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과제를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독립운동가와 독립유공자

게재 순서(1~10회)

1. 충북의 독립운동가
2. 3.1운동 개관
3. 손병희
4. 권동진
5. 신석구
6. 신홍식
7. 권병덕
8. 손승억
9. 신규식
10. 신건식

청주 중앙공원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 1949년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 내내,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민족은 일제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지속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은 연합국의 승전과 일본의 패전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모든 방법론을 동원하여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의 결과이다. 물론 완전한 자력으로 독립을 오롯이 쟁취해 낸 것은 아니나, 국제사회와 더불어 이뤄낸 값진 승리의 결과인 것이다.

한민족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음으로 양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한민족은 모두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가운데에서도 국가가 정한 일정한 기준 이상의 독립운동을 하여 정부로부터 그 공적을 인정받은 분을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독립유공자의 포상은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제82호로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 공포되며 시작되었다. 1977년부터는 그 업무가 원호처(1987년 국가보훈처로 정부 조직 개편)로 이관되어 본격적인 독립유공자의 선정과 포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광복 50주년과 60주년을 계기로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졌고, 공산주의 계열까지 독립운동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2005년부터는 신청을 받아 이루어지던 기존의 소극적 포상정책으로부터 탈피하여 독립유공자 발굴을 위해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을 운영하는 등 전향적인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포상자 수가 대폭 증가되는 추세에 있으며, 발굴 포상자의 비율이 90%를 넘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포상은 5개 등급의 건국훈장(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 7개의 등급으로 나눠 시행된다. 독립유공자의 등급을 차등을 두어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송구한 일이다. 연금 지급 등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그 구분이 독립운동가 개인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은 물론이다.

충북 출신의 독립유공자


2015년 현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은 충북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443명이다. 이는 전국의 독립유공자 13,409명 중 3.3%에 불과한 숫자이다. 그러나 충북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국내는 물론 이역만리 해외에서도 독립운동의 전 분야를 주도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청주 3.1공원에 조성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운동계열 구분에 따르면, 충북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은 독립운동의 14개 계열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운동계열은 3·1운동과 의병계열이며, 그 다음이 국내항일, 만주방면, 광복군, 임시정부, 학생운동, 중국방면, 미주방면, 일본방면, 계몽운동, 의열투쟁, 문화운동, 인니방면의 순이다.


즉, 충북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운동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한편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를 훈격별로 분류해 보면 대한민국장 1명, 대통령장 5명, 독립장 35명, 애국장 106명, 애족장 188명, 건국포장 19명, 대통령표창 89명이다. 건국훈장의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의 주인공은 손병희로서, 충북에서는 유일하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대표로서 일제 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한 공적을 인정받은 것이다. 대통령장 추서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한 권병덕·신석구·신홍식과, 헤이그 특사로서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한 이상설,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될 터전을 닦은 신규식이 그들이다.

독립장 추서자들의 운동계열은 더욱 다양해진다. 홍진은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고, 신팔균은 통의부에서, 채찬은 서로군정서에서 만주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서상렬과 김상태 등은 제천의 전기의병에 참여하였고, 권용일과 박여성 등은 후기의병에 참여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섰다.

특히 한봉수는 충북의 후기의병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유격전의 명수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평민 의병장이었다. 황학수는 항일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서 해방을 맞이하는 날까지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홍범식과 송병순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단호한 반대 의지를 천명하였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곽재기는 밀양결찰서 투탄 계획을 실행하고자 하였고, 유석현 또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을 시도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독립유공자가 있으나, 향후 연재를 통하여 그 분들의 진면목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충북지역은 11개 시군에서 골고루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시군별로 독립유공자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이색적인 독립유공자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 보면 종종 이색적인 독립운동가를 만나게 된다. 충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먼저 낭성·가덕·미원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고령신씨(일명 산동신씨)의 '산동삼재(山東三才)'라 일컫는 신규식·신채호·신백우를 들 수 있다.

이중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결을 기도하였다가 시신경을 다쳐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그의 호가 '흘겨본다'는 의미의 예관(目+兒觀)인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그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노력한 결과였다. 그는 1922년 9월, 무정부상태에 빠진 임시정부의 혼란을 비통해 하며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는 날까지 투쟁하였다. 그의 사위는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비서를 지낸 민필호였고, 민필호의 사위는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이니, 신규식-민필호-김준엽은 장인과 사위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었다.

신규식의 동생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신건식이다. 신건식은 형을 따라 상하이로 가서 동제사와 대동보국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형이 사망한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곧 신규식과 신건식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형제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부녀 독립운동가도 있다. 신순호는 신건식의 딸로서,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녀는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군되자 여군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부군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 장교로 활동한 박영준인데, 박영준은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를 전담했던 남파 박찬익의 아들이다.

정순만과 정양필은 부자 독립운동가이다.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만'으로 불리던 정순만은 북간도와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정양필은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성공하여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자원한 인물이었다.

이번의 기획 연재는 여건상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 중 독립장 이상 수여한 분만을 대상으로 그들의 열전을 정리하기로 한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바란다.

/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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