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5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용일

문무를 겸비한 '이강년의 부장'
18세 때 가족에 구국의 뜻 알리고 무일푼 가출
민긍호 의병부대와 연합 구축 제천서 첫 승리
이름·신분 숨기고 이강년 곁 지키며 옥바라지
해방후 귀국 88세에 사망…단양 군민장 거행

  • 웹출고시간2015.06.07 14:38:08
  • 최종수정2015.06.07 18:31:32
광복 70주년 기획 연재

16. 권용일

권용일(權用佾, 1884~1971)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한말 의병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1907년 호좌의진을 계승한 이강년 부대에 투신하였고, 제천 천남전투 이래 충주, 문경, 영월, 안동 등지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의병으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일년 남짓이지만, 그의 대담함과 불굴의 투지는 후기의병사에서 단연 빛난다.

어려서 충(忠)·효(孝)·열(烈)을 마음에 새기다

권용일은 충청북도 청풍군 원서면 덕곡리(현재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에서 권태인(權泰仁)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20세 함(瑊)을 중시조로 삼는 안동권씨 화천군파로, 17세기 초부터 제천에서 세거해왔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형인 용연(用淵)은 농업으로 가사를 돌봤는데, 둘째였던 그는 11세가 되던 해에 서당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은 대내외로 큰 위기상황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갑오개혁을 통해 한국의 내정개혁을 강요하였으며,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 한국에 대한 침탈을 가속화하였다. 이에 대한 한민족의 반일 감정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 봉기로 표출되었다.

권용일 묘소 (충북 제천시 청풍면 용곡리 146-5번지).

그의 회고에 의하면 18세가 되던 1901년 가을, 그는 문득 장래와 가정형편, 국가정세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왜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구하여 강토를 보존하리라 다짐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는 지난 날 서당에서 배웠던 충·효·열의 세 글자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서당 선생님은 어린 그에게 '충·효·열의 의미를 잊지 말고 죽는 날까지 마음에 품어야 죽어서도 좋은 이름을 전하리라'라고 가르쳤다.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했던 그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집을 나섰다.

이강년과의 운명 같은 만남

무일푼으로 집을 나온 그는 곧 의식주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는 결국 행상을 하며 2년여를 보냈고, 이때 번 돈으로 우선 공부를 더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공주의 친구 집에서 머물며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 후 그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때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다음날 경상도로 향하여 금오산에 들어가 일제 침략에 무장 항쟁을 하고자 병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평생 가장 뜻 깊은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강년과의 만남이었다. 이강년은 1896년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유인석과 사제 관계를 맺어 호좌의진의 유격장으로서 문경, 수안보 등지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이강년은 유인석이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국내외를 오가며 은거하다가 1907년 제천에서 재봉기하였다. 권용일이 이강년을 만난 것은 이맘 때로 이 둘의 만남은 권용일의 저서인 『정미왜란창의록(丁未倭亂倡義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금오산을 지나던 이강년은 산중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따라와 권용일을 만나게 된다. 서로 통성명을 한 후 이강년은 권용일에게 병서를 읽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권용일이 "평세도 난세가 되고 난세도 평세가 됨은 천지음양의 이치인데, 문무 겸비를 어찌 괴이하다 하십니까"라고 대답하니 이강년은 내심 탄복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에 있을 재회를 생각하면 둘 모두에게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원주에서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정미조약 체결과 더불어 군대해산이 강행되었다. 해산군인이 의병에 합류하여 후기의병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러 가던 이강년과 민심을 살피고 다니던 권용일은 원주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눈 둘은 척왜의 뜻을 모아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는 한편, 군사를 모으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거둔 무기는 배양산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이를 근간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탄환을 가져오다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진위대 출신의 군인들로부터 전술훈련을 받은 이강년 부대는 민긍호 의병부대 등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제천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매복해 있던 권용일은 일본군을 급습하여 의병으로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얼마 후 40여 의병부대가 강원도 영월군 주천에 모여 의병진의 재편성을 추진하였고,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였다. 권용일이 기록한 『정미왜란창의록』에 의하면 이때 그는 우군선봉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의 복상골 전투를 보도한 황성신문 기사(1907.12. 26).

재편성을 마친 의병부대는 충주성을 공격 목표로 하였다. 비록 여러 부대가 연합하였지만 충주성 공격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는 경북의 풍기·문경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탄환이 부족하게 되어 배양산에 숨겨둔 것을 가져와야만 하였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총독장 이만원과 함께 숨겨둔 탄환을 가지러 떠났다.

두 사람은 변장을 하고 밤낮으로 걸어 배양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중량의 탄환을 어깨부터 허리까지 두르고, 그 위에 옷을 입어 감췄다. 돌아오는 길에 제천 송수동과 청풍 후평에서 적을 만나기도 하였지만 무사히 피하여 본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강년과 부대의 모든 장졸들이 그들의 용감함을 칭찬하였고, 이를 계기로 우군선봉이었던 그는 도선봉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가져온 탄환으로 무장한 의진은 문경 갈평에 일본군이 있음을 포착하고, 사방에 매복하여 이강년의 지휘아래 불시에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의병은 다량의 무기를 노획하고 적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승전은 위험을 무릅쓰고 탄환을 짊어지고 온 그와 이만원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

의병 항쟁의 한계를 느끼고 만주로

갈평 전투 이후 이강년 부대는 충청, 강원, 경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수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추워지는 날씨에 계속되는 적병의 추격과 탄환의 부족, 지역민들의 비협조, 의병들의 피로 누적 등은 부대의 사기를 급격히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의진은 영춘 복상골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의병이 피체되고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인해 다수의 장졸들이 흩어졌는데 권용일 또한 본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해가 바뀌어 1908년, 그는 백남규와 함께 군사를 모으던 중 간신히 본진의 소식을 접하여 합류할 수 있었다. 전열을 가다듬은 의진은 안동 서벽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 봉화 내성과 안동 재산에서도 일본군을 무찔렀다. 하지만 누차에 걸친 전투로 인해 탄환은 모두 떨어졌고, 일제의 끈질긴 탄압이 계속되면서 의진도 점차 해산되어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강년은 새로운 근거지 마련을 위해 잔여 의병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제천 인근의 까치성에서 잠시 쉬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의진의 동향을 탐지한 일본군 수비대의 습격으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로 이강년은 불행히 왼쪽 발목에 총상을 입어 피체되었고, 주요 간부들이 전사하면서 이강년 부대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까치성 전투로 이강년이 피체되자 권용일은 이강년의 옥바라지를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의병 신분을 숨긴 채 이강년을 찾아다니다가 이강년이 평리원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이 남달랐던 만큼 그는 이강년의 곁을 지키며 정성스레 옥바라지를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강년은 1908년 10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후 권용일은 국내에서의 의병투쟁에 한계를 깨닫고,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만주에서의 장기적이고 본질적인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김규흥(金奎興), 이범구(李範九), 김규철(金奎澈)과 함께 결의하여, 고종이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보내는 청병조서(請兵詔書)를 받아 중국으로 가는 길에 나섰다. 그러나 도중 일제에게 발각되어 그를 제외한 3명은 피체되었고, 그 혼자만 정경노(鄭敬老)라고 이름을 바꾸어 간신히 망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고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다.

그가 출생한 충북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 전경.

해방이 된 후 귀국한 그는 1971년 9월 5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고, 장례는 단양군민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그의 생전인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그가 태어난 한수면 덕곡리에는 마을자랑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숭모하고 있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용곡리 146-5번지 위치해 있다.

/ 홍순영(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