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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유석현

충주 농업학교에서 류자명 밑에서 수학 큰 영향
3.1운동후 일경 추적…중국 망명 의열단에 가입
폭탄 국내반입… 요인 암살하려다 실패 8년실형
제9대 광복회장 역임… 독립기념관 건립에 기여

  • 웹출고시간2015.08.02 18:35:15
  • 최종수정2015.08.02 18:35:15

유석현

[충북일보] 유석현(劉錫鉉, 1900~1987)은 충주 출신으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도모했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 충주의 3·1 운동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단원으로서 의열투쟁에 필요한 자금 확보와 요원확충을 위하여 1922년 국내에 잠입, 판사 백윤화(白允和)로부터 군자금 모금을 시도하는 활동을 하였다. 특히 유석현은 1923년 의열단의 제2차 폭파·암살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결국 일제에 의해 8년형을 선고받았다.

류자명과의 만남과 의열단 가입

유석현은 1900년 5월 14일(음력)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33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간이농업학교에는 훗날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류자명(柳子明)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유석현은 류자명에게 수학하며 그의 독립사상에 깊이 공감하였다.

유석현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로 접어든 것은 3·1운동이었다. 류자명의 회고에 따르면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당시, 그는 간이농업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3월 10일을 기해 충주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는데, 유석현이 류자명의 제자로 있었다는 점과, 공훈 자료에 유석현이 고향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고 하는 기록으로 볼 때 유석현도 이때 가담하여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3·1운동 이후 유석현은 1919년 11월 중국 만주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회영이 거주하던 베이징 시내 골목. 당시 신채호, 류자명, 유석현 등 독립운동가의 회합장소로 이용되었다.

유석현은 망명 당시 길림을 목적지로 하였으나, 일제에 발각되어 베이징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베이징에서 김원봉의 권유로 1921년 7월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유석현은 베이징에 머무를 당시 이회영(李會榮)의 집에서 유숙하며 지냈으며, 박용만(朴容萬)의 추천으로 베이징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그는 학생 신분을 이용하여 국내를 오가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다. 유석현을 가르치던 이회영은 유석현에게 장기적 독립운동을 위하여 독일이나 프랑스의 유학을 권하였으나 유석현은 "독립투쟁을 하고 나라를 세우는 것은 파괴와 건설인데 저는 일본에 대한 파괴에만 전념하겠습니다"라며 의열활동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류자명과의 만남과 3·1운동의 참여계획은 운명처럼 유석현을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으며, 의열단 가입은 독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한 독립자금 모금활동

의열단 비밀요원으로 국내로 잠입한 유석현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을 파괴하기 위한 자금마련을 위하여, 동지 김지섭(金祉燮), 윤병구(尹炳球)와 함께 1922년 12월 23일 무교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 백윤화(白允和)의 집에 들어갔다. 백윤화는 당시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백운영(白運永)으로 백상회(白商會)를 운영하는 부호였다. 유석현은 백윤화 부자의 직업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부유한 점에 착안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유석현의 판결문

ⓒ 1923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
유석현은 당당히 백윤화의 집에 들어가 의열단 경고문을 내보이고 거금 5만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백윤화가 보유한 현금이 120원에 불과했고, 부친 백운영 역시 돈이 없다는 핑계로 오후에 법원 사무실로 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석현은 김지섭 등과 대담하게 오후 3시경 경성지방법원에 갔으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유석현과 김지섭은 격분하여 두 부자에게 응하지 않을 경우 목숨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 재차 경고하고 자금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백윤화의 계략으로 24일 그의 집 앞에서 동지 윤병구가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유석현은 이 과정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였으나 궐석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쫓기는 신세가 된 유석현은 1923년 1월 김지섭의 소개로 경기도 경찰부 경부로 재직 중인 황옥(黃鈺)의 집에서 머물렀다. 당시 황옥은 조선인으로서 일본 경찰간부직에 올라있던 자로 2차 대규모 암살 파괴작전 기획 당시 밀정 여부를 두고 시비가 일고 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석현은 김시현(金始顯)과 김지섭의 추천으로 그를 믿고 그의 집에 머물며 때를 기다렸다.

제2차 의열단 대암살·파괴 계획

기회를 엿보던 유석현은 1923년 1월 12일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로 조선 전체가 발칵 뒤집히자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의열단 동지의 담대하고 장렬한 의거로 다시금 의열투쟁의 열망이 타오르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를 지원하던 황옥은 김상옥의 폭탄출처 확인 등을 이유로 유석현을 김세진(金世震)으로 위장시켜 텐진으로 잠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의열단 대암살·파괴 계획 당시 유석현이 지참하였던 의열단의 조선총독부 소속 각관 공사에게 보내는 경고문

1923년 2월 11일, 우여곡절 끝에 텐진에 도착한 유석현은 그곳에서 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유석현은 제2차 대암살·파괴계획의 구체적인 지령을 전달 받았다. 그 지령의 내용은 1923년 5월을 기해 전국 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논의를 거쳐 3월 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경찰서·재판소·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이에 따라 폭탄의 국내반입 작전이 시작되었다.

헝가리인 마잘이 제조한 고성능 폭탄 등 의거 준비물은 3월초 텐진에 도착했다. 마잘 등이 텐진에 반입하여 전달한 파괴 무기들은 3종류의 폭탄 36발, 권총 5자루, 실탄 150발 기폭 장치 6개, 「조선혁명선언」, 「조선총독부 소속 각관 공사에게 보내는 경고장」 3,000매 등이었다. 이들 무기는 먼저 백영무(白英武)와 이현준(李賢俊)이 만주 안동현 홍종우(洪鍾宇)의 집으로 일부 운반하였고, 나머지는 3월 5일 유석현, 김시현, 황옥이 각각 나누어 운반하였다. 이들은 정세를 살핀 후 다시 무기를 3월 8일과 10일 양일 간 안동현 철교를 건너 평안북도 의주군의 백영무의 집을 거쳐 신의주부 한성여관(漢城旅館)에 반입하였고, 이후 신의주역을 통해 경성부 효자동 조황(趙晃)의 집으로 배송하였다.

폭탄이 운반된 뒤, 유석현은 신의주에서 따로 소량의 폭탄을 가지고 3월 12일 경성에 잠입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김시현 등이 들어왔고, 계획대로 준비한 폭탄과 인원이 모두 경성에 모이게 되었다. 이로서 의열단의 암살·파괴 계획의 성공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석현이 조황의 집에서 이현준 등과 함께 머무르며 거사를 준비할 3월 13일경, 조황의 친구이자 일제의 밀정이였던 권태일(權泰逸)은 조황이 맡긴 폭탄을 들고 경무국으로 향했다. 조황은 권태일을 독립지사로 믿고 폭탄 일부를 맡겼으나 그는 일본 경찰의 앞잡이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의열단 핵심 인물들이 참여한 이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김지섭은 고초를 겪고 겨우 경성을 탈출하였으며 유석현, 김시현, 황옥, 이현준 등이 기소되었다. 이중 김시현과 황옥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유석현은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비록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은 실패하였지만 당시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컸다. 유석현은 1982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에서 당시 사건의 결과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실패했지요. 그러나 큰 성공이었습니다. 황옥이 경부라는 가면을 쓰고 의열단에 가담해 동포들의 사기를 크게 올린 것도 그렇고, 우리가 일본 총독을 죽이려 한다는 걸 만방에 알림으로써 왜정의 조선지배가 실패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 것도 의미가 컸습니다"

그가 회고하듯,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은 비록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제국주의 일본의 잔혹한 식민 통치에 당당히 맞서 싸운 조선인의 긍지를 보여준 '큰 성공'이었다.

충주에서 아나키스트 활동, 꺼지지 않은 독립의 불꽃

유석현의 독립운동활동이 기록된 충주독립유공자공적비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중앙탑 사적 공원 입구
유석현은 옥고를 치르고 1928년 5월 17일 출감했다. 출감 이후 그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으며 고향인 충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1929년 충주 아나키즘 독립운동단체인 문예운동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문예운동사는 충주에서 아나키스트 서정기(徐廷夔)·서상경(徐相庚)·김현국(金顯國) 등의 주도로 창설된 문예단체로서 표면적으로는 문학활동을 표방하였으나 사실 아나키즘을 연구하고, 아나키즘 이론으로 식민지 조선을 타도하고자 한 단체였다. 그러나 문예운동사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유석현은 이 과정에서 1929년 5월 9일경 피체되었다가 풀려났다. 이후 더욱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된 유석현은 주변인들의 밀고로 가택수사를 당하는 등 혹독한 생활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는 1930년 서울 교동에 위치한 과자점 팔진옥(八珍屋)에 드나들며 의열단원들을 만나 시국을 논하였고 국내 천도교계열 이응현(李應辰), 김현국(金鉉國) 등과 교류하여 독립단체를 조직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고, 1941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유석현은 중국과 국내를 오가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의 한 사찰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이후 그는 1984년 제9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하고, 독립기념관 건립을 후원하는 등 독립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김진웅(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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