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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한봉수

내수의 가난한 농부 아들 출생 사냥에 남다른 자질
정보수집 탁월… '현금든 행랑'만 골라 6차례 공격
신출귀몰하는 유격전술… 사형선고 두번이나 받아
'자수 출원'을 흠결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 웹출고시간2015.07.26 15:38:41
  • 최종수정2015.07.26 15:42:33

한봉수

[충북일보] 한봉수(韓鳳洙, 1884~1972)는 청주 출신으로 1907년 후기의병에 참전하여 뛰어난 전공을 쌓았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의병전쟁으로부터 3·1운동으로 전승되는 독립운동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가교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의병장으로서 그의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소개될 만큼 당시에도 유명하였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사격과 사냥에 자질이 뛰어난 아이

한봉수는 1884년 4월 18일, 충북 청원군 북일면(현, 청주시 내수읍) 세교리 197번지에서 가난한 농부 한진영(韓進榮)과 경주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후에 청암(淸巖)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한봉수 생가터

ⓒ 충북 청주시 내수읍 초정리
그의 선조 중에는 문신 출신도 있었으나, 무신으로 무공을 쌓은 인물이 더욱 많다. 이는 그가 의병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가문적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였고, 그의 대에 이르러는 홀어머니가 장터에서 장사를 하는 상민(常民)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한봉수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후손 등의 증언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사격과 사냥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평민 의병장으로서 후기의병 참여

1907년, 일제의 한국 침략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7. 19),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였다(7. 24). 그리고 한국 침략의 마지막 걸림돌인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시켰다(8. 1). 불과 10여일 사이에 대한제국은 주권을 강탈당하고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에 또 다시 의병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후기의병이다.

충북지역에서는 청주진위대 해산 이후 의병투쟁이 격화되었다. 이해 8월 4일, 청주진위대 해산식이 청녕각 앞뜰에서 거행되었다. 청주진위대는 지방 8개 대대 중 제2대대로서 병력은 160명(장교 7명, 하사 및 병졸 153명)이었다. 청주진위대 소속 병사들은 군대해산의 낌새를 눈치 채고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한봉수의 의병투쟁 공적을 기록한 모래재격전기념비

ⓒ 충북 괴산군 사리면 모래재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7월 26일 대전수비대 소속 보병 15명을 청주로 급파하였다. 이어 해산 전날인 8월 3일 병력을 증파하고, 청주진위대의 탄약을 압수해 두었다. 해산식 때 진위대원들은 비분강개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산한 진위대원들 중 상당수가 의병으로 참전하여 미원·세교·문의·오근장·두산·괴산 등지에서 활발히 투쟁하였다.

당시 한봉수는 청안에서 목화의 씨를 빼내는 가내수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일련의 상황을 목도하며, 1907년 9월 해산군인 출신인 김규환과 함께 분연히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일제측 자료에 한봉수가 '진위대 상등병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동안 그를 진위대 출신으로 잘못 이해해 왔다. 이는 그가 의병으로 나선 시점, 해산군인들과의 교분, 신출귀몰한 유격전술 등으로 인한 오해에서 빚어진 오류이다. 그는 평민 의병장이었다.

일제를 놀라게 한 정보 수집과 유격전술

의병으로 봉기한 한봉수는 1910년 2월까지 2년 반에 걸쳐 모두 26회의 활발한 투쟁을 펼쳤다. 그의 투쟁 유형은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처단, 밀정과 변절자 처단, 일본군과 교전, 우편행랑 습격과 군자금·무기 노획 등 다양하였다.

일제의 삼엄한 호위 하에 운송 중인 우편행랑을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것은 그의 대표적 활동이었다. 그는 6차에 걸쳐 우편행랑을 공격하는 투쟁을 벌여 모두 성공하였다. 그가 우편행랑을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행랑 속에 들어 있던 현금 때문이었다. 이 투쟁은 그의 정확한 정보수집 능력과 뛰어난 유격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우편행랑의 통과 일시와 지점, 호위병 수를 정확히 파악하였다가 유격하기 좋은 지형을 선택해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였다.

이 같은 활동은 그의 고향인 가는다리와 초정 및 괴산과 진천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이곳 지형에 밝은 그에게 군자금 획득과 무기 노획을 위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노획한 현금을 군자금으로 활용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민중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또한 노획한 무기로는 열악한 무장을 보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일제의 의병탄압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한봉수를 지칭하며 "해가 갈수록 의병들의 첩보술과 경계술 등 전술이 일본 토벌대를 우롱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고 실토한 것은 그의 활동을 잘 알려준다.

문백면민이 세운 한봉수공적비(위)와, 일제 통감부가 세운 일본 헌병 상등병 시마자키 순직비(좌)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청주에서 국도 17호선을 따라 진천을 가다 보면 문백면 옥성리에서 농다리로 가는 삼거리 국도변에 바위배기라고 불리는 조그만 동산이 있다. 이곳에는 매우 특이한 비석이 두개 서있다. 당초 그 정상부에는 1908년 6월 10일 우편행랑을 호위하며 이곳을 지나다가 한봉수의 사격으로 죽은 일본 헌병 상등병 시마자키(島崎善治)를 추도하기 위해 통감부가 세운 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1977년 문백면 주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리고 주민 성금으로 만든 '한봉수항일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당시 주민들은 이 비를 깨부수려 하였으나, 암질이 너무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자, 글자를 시멘트로 문질러버리고 한봉수항일의거비 아래에 세워 두었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의병장을 기리는 비와, 의병장이 사살한 일본군을 기리는 비가 함께 서 있는 의병투쟁의 현장이다.

의병의 끝자락 '자수 출원'의 진실

공주지방재판소는 1908년 11월 20일, 궐석재판을 통해 한봉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는 그가 일제에 붙잡히지 않고 교묘히 활동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제에게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의병들의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도 일제는 그를 두려워하며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봉수의 교수형 판결문

ⓒ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
그러나 1910년이 되자, 그도 대부분의 부하를 잃고 근거지를 상실한 채 피신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봉수는 충북경찰부에 '자수' 의사를 타진하였고, 전라지역에서 활동하던 문태수 의병장의 체포에 협조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충북경찰부는 그의 '자수'를 이용하여 문태수 의병장을 잡고자 하였으나 끝내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충북경찰부는 서울에 있던 그에게 형사대를 급파하여 체포해 버렸다. 그의 체포 소식은 즉각 통감, 경시총감, 헌병대장, 군사령관 등 일제 수뇌부에 보고되었다.

어떤 연구자는 그의 '자수 출원' 사실만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의 공적을 심하게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역사해석의 단견을 드러낸 것일 따름이다. 그가 '자수 출원'을 한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일제가 자수하겠다는 그를 서둘러 체포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그가 체포에 협조하겠다고 제시한 문태수 의병장은 1911년 8월에서야 붙잡혔다. 이때는 한봉수가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머물 때로서, 그가 문태수 체포에 전혀 협조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붙잡혀 청주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일본인 검사와 내부 경무국장이 주고받은 전보는 그의 행적을 판단할 주요 근거가 된다.

즉, 일본인 검사가 그의 '자수 출원' 여부를 조회하자, 경무부장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체포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회신하였다. 이는 그의 죄를 경감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자수 출원'에 따른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이해 6월 29일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 수범(首犯)으로 최고형인 교수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두 번째의 사형 선고였다.

엄정한 역사 평가의 올바른 길

한봉수 동상

ⓒ 충북 청주시 상당공원
만일 그가 의병 활동만으로 독립운동을 그만 두었다면, '자수 출원'은 흠결사항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합방대사령'으로 풀려난 그는, 3·1운동 때 고향에서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다가 피체되어 또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이는 의병장 출신이 보통학교 학생들을 주도하여 만세운동을 벌인 유일한 사례이자, 의병과 3·1운동의 내재적 전승을 실증적 구체적 사례이다. 따라서 그를 독립운동의 전 과정 속에서 전인적으로 평가할 때 '자수 출원'을 흠결로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는 나라가 망하는 데 별로 책임이 없는 평민이었다. 고관대작으로서 국록을 받았던 것도 아니고, 지식인으로서 도덕적 책무를 느끼지 않아도 될 그저 시골의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키자고 목숨을 걸고 의병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을 받았으나, 다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또 옥고를 치렀다. 그에게 '자수 출원'을 흠결로서 가혹하게 강변하는 것은 역사평가의 정도가 아니다. 역사 평가의 엄정한 잣대로 재단해야 할 대상은 한봉수가 아니다. 그 대상은 바로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간 장본인들, 그리고 일제에 기생했던 관료와 지식인들이다. 이는 한봉수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 박걸순(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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