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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석구

일본 검사 앞에서 꼿꼿… 민족대표 중 형량 가장 높아
유교적 가풍불구 국권 회복의 길은 기독교에서 찾아
형의 가족까지 부양 책임… 한 때 청주서 전당포 운영
새벽 기도 중 '하늘의 음성' 듣고 기미년 3.1운동 참여
북에 남아 반공활동, 6.25때 퇴각하던 북한군에 희생

  • 웹출고시간2015.03.15 17:14:04
  • 최종수정2015.03.15 17:14:04

생전의 신석구 모습.

신석구(申錫九, 1875~1950)는 충북 출신의 기독교 목사로서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했고, 이후 신사참배거부 등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으로 항거했다. 그의 독립운동은 기독교적 종교 신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갖는다.

◇일찍이 가족을 잃고 방황하다.

신석구는 1875년 5월 3일 현재의 충북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금관리에서 신재기(申在綺)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을 시조로 하는 평산신씨 30세손이다. 집안은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으나 그 부모는 전통적 유교사상에 입각한 절제된 생활로 늘 어린 석구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신석구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잇따른 가족의 죽음이 그 원인이었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열다섯 살 때까지 어머니·할아버지·아버지·할머니를 차례로 여의었다. 그리고 26세 되던 1899년,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마저 떠나보내고 말았다.

신석구는 형이 남기고 간 가족들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1901년부터 약 5년간 친구 김진우를 도와 청주에서 전당포를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는 친구를 대신해 횡렴 혐의를 뒤집어쓰고 3개월 간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석방된 뒤에는 고향을 등지고 상경했는데, 1907년 음력 정월의 일이었다.

◇33세의 늦은 나이에 기독교 입교

신석구는 서울에서 김진우와 재회했다. 두 사람은 경기도 장단의 고랑포로 가서 약국을 열었다. 그런데 먼저 상경하여 이미 기독교를 믿고 있었던 김진우가 약국을 열기 무섭게 신석구에게 기독교로의 입교를 강권했다.

신석구의 목사 안수 증명서(1917년).

33세 되던 1907년, 유학적 가풍 속에서 자란 신석구는 드디어 기독교에 입교했다. 그의 입교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그 자신의 신념차원에서 보면 그때껏 신봉했던 유교에 대한 불신과 반발의 표출이었다. 가족의 잇따른 죽음 속에서 그는 선행을 강조하는 유교의 복선화악(福善禍惡)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한편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보면, 신석구의 입교는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R.A Hardie, 河鯉英)가 주도한 부흥운동의 연장선 속에 있었다. 부흥운동은 개성과 서울을 거쳐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으로 확산되었는데, 신석구가 입교한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독교 속에서 구국의 방략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의 바탕에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에 처한 조국의 현실이 있었다. 을사늑약으로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1907년 들어 광무황제가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강제퇴위를 당하고, 정미칠조약으로 군대가 해산 당했는가 하면 사법권과 관리임명권까지 일제의 손에 넘어가 말 그대로 나라가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었다.

기독교 교리의 전파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으로 인식한 신석구는, 이후 10년 간 전도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러던 1918년 11월, 서울 수표교교회로 파송되어 오게 되었다.

◇민족대표로서 3·1운동에 참여하다

신석구가 서울로 부임한 시기부터 3·1운동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조성되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이듬해 1월부터 세계질서 개편을 위한 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러던 1월 22일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독살설이 급속히 퍼져나갔고, 2월 8일에는 도쿄의 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1910년의 강점 이후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 등의 경제침탈로 한민족의 불만은 고조될 대로 고조된 상황이었다.

신석구의 정치범카드(1929년).

이 같은 배경에서 2월 초부터 3·1운동이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늦은 2월 16일에 감리교 목사 오화영과 정춘수가 만나 협의하면서 신석구가 속한 남감리회의 참여도 본격화 되었다. 이때부터 오화영은 남감리회를 대표하여 운동을 준비했는데, 신석구에게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한 이도 오화영이었다.

신석구는 오화영의 권유에 바로 답을 하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교역자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교리가 다른 천도교와 연합하는 것에 대한 확신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국 신석구는 민족대표 33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고 자신이 합류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2월 27일 새벽기도 중에 들은 '하늘의 음성'에 있다고 밝혔다. 잃어버린 강토를 찾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노력해야 한다는 복음을 들은 것이다.

드디어 3월 1일이 왔다. 민족대표 33인 중 참석치 못한 4명을 제외한 29명이 태화관에 모였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돌려 읽었고 한용운이 간단한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신석구를 포함한 민족대표 참석자 전원은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1920년 10월 30일의 결심공판 때까지 무려 1년 8개월에 걸친 기나긴 심문과 공판이 이어졌다. 신석구는 신문과 공판과정에서 당당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확신한다고 말했으며, 이후에도 재차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일본인 검사의 물음에 대해서도 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단호히 답했다.

청주 3.1공원에 조성된 신석구 선생 동상

이 같은 신석구의 태도는 일제가 선고한 형량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1920년 10월 12일 형사부 공판담당 검사는 신석구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이는 3·1운동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손병희와 같은 형량이자 민족대표 중에서 가장 높은 형량이었다.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판사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예심과정에서 미결수로 1년의 옥고를 치러 사실상 3년을 선고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신석구는 약 2년 8개월, 978일간의 투옥생활을 마치고 1921년 11월 4일에 만기 출옥했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맞서다.

출옥 이후 신석구는 1921년부터 1935년까지 감리교회 목사로서 목회에 전념했다. 원산·춘천·고성·철원·서울·가평 등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그에게 목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인 동시에 독립운동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신석구를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의 도발을 계기로 한민족말살정책을 더욱 강제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일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석구로서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64세 되던 1938년 7월, 신석구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천안경찰서에 2개월간 구금되었다. 이후 신석구는 일제의 신사가 없는 평남 용강군 진남포 신유리의 교회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제의 진주만 공습이 있을 무렵, 신석구는 아무런 죄도 없이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예비 검속을 당했고,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둔 1945년 5월에도 전승기원 예배를 주도하고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또 다시 용강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분단의 희생양이 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했다. 71세 되던 신석구는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았다. 비록 일제는 물러갔지만 신석구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지역에 들어선 공산정권과 기독교인들의 대립이 그 원인이었다.

열렬한 기독교목사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신석구 역시 이 같은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중앙방송에서 3·1절 기념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보위부에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3월 1일에도 진남포 도립극장에서 3·1절 기념강연을 하여 정치보위부에 재차 연행되었다. 같은 해 6월 15일에는 그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자유당이 '북한 인민정권 전복 혐의'로 탄압을 당하였다.

북한 정권의 기독교 탄압은 1949년 4월 19일의 '진남포 4·19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진남포에는 기독교 목사들을 주축으로 맹호단(猛虎團)이란 단체가 공산정권에 반대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일망타진 당하는 과정에서 신석구가 '수괴'로 지목되어 연행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신석구는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이내 원통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듬해에 벌어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국군에 밀린 북한군은 평양을 버리고 퇴각하면서 수감되어 있던 이들을 학살했는데, 바로 이때 평양 인민교화소에 구금되어 있던 신석구 역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1950년 10월 10일의 일로 그의 나이 76세였다.

신석구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숭고한 애국심은 그의 후손에게 이어졌다. 증손자인 신현우씨는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고회에서 목사로서 증조부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정부는 신석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이용철(독립기념관 연구원·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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