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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정운경

성리학 이상으로 국난 극복하려 했던 '행동파'
접소 불태우는 등 동학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
일경 피체… 15년형받고 황해도 외딴섬 유배
해배되었으나 여비 없어 3개월만에 고향도착

  • 웹출고시간2015.10.11 15:31:05
  • 최종수정2015.10.11 15:31:05

정운경

[충북일보] 정운경(鄭雲慶, 1861~1939)은 제천 유력가문 출신으로 영춘에 살면서, 을미의병기 호좌의진 참여를 시작으로 을사의병기에는 원용팔에 이어 단양에서 의거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의 의거는 유학을 공부하면서 단순히 현실의 묵수나 과거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성리학적 이상을 지키며 유학자로서 민족이 처한 위난을 극복하려는 충절에서 비롯된 지행합일의 실천이었다.

◇ 제천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다

정운경은 1861년(철종12) 2월 9일 제천의 월림(月林)에서 정희원(鄭羲源)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 자는 화백(和百), 호는 송운(松雲)이다. 그의 집안은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정보연(鄭普衍) 때 제천에 터전을 잡은 이후 정보연의 손자인 정익하(鄭益河)가 나라로부터 불천위를 인정받으며 지역사회의 명문으로 번성하며, 인근의 유력 문중과 연이은 혼인관계를 통하여 향촌 내에 기반을 굳혔다.

정운경의 생가지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정운경은 고향에서 재종숙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타고난 재질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24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하고 그 다음해에 부인인 한산 이씨가 두 딸을 남기고 일찍 타계하는 슬픔을 겪었다. 이후 정운경은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나가려는 뜻을 접고 스스로 덕을 닦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동학농민군에 맞서다

정운경은 31세 되던 1891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대대로 살아오던 제천 월림을 떠나 영춘의 모실(현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로 이주하였다. 34세가 되던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의 여파는 그가 살고 있던 영춘에도 밀려왔다. 이곳은 일찍부터 동학의 지도부가 은신하여 포교를 폈던 동학세력이 뿌리 깊은 곳으로, 영춘을 비롯한 단양, 영월 쪽 동학교도 수백 명이 무리를 만들어 왕래하면서 장차 있을 관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동네마다 보루를 쌓는 등 그 기세가 당당하였다.

그는 이러한 동학도의 활동을 "동학은 겉으로는 의병을 주창하면서도 안으로는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자"로 규정하고 향촌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세력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여 향촌의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직접적 힘을 동원하여 이들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1894년 9월, 그는 인근의 유생들과 의논하여 통문을 돌려 동학농민군에 대항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수령에게 그 계책 의논하기도 하였으나 그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에 적극 동조하는 유생인 허준, 권진 등과 함께 야음을 틈타 궐기하여 동학도 네 사람을 체포하여 수령에게 바쳤다. 그러나 수령이 그 해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이들을 타살하고, 경내의 접소를 모조리 불태우고 교도들을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 을미의병에 투신하다

1894년 6월 일제는 경복궁을 점령한 후 갑오개혁, 연이어 1895년에는 을미사변, 을미개혁 등 조선침략에 나섰다. 이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은 전국에서 의병 궐기로 나타났다. 그는 왕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는 현실을 보면서, 이를 국가의 변고라고 인식하였다. 그는 곧 제천에서 먼저 의병이 일어났음을 알리는 '격고사림문'(檄告士林文)을 지어 영춘 지역민들에게 알리고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손수 무리 수백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정운경이 유인석에게 받은 전군장 임명장

1896년, 정운경 부대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의 부름을 받자 호좌의진에 합류하였다. 그는 호좌의진에서 전군장이 되어 청풍의 북창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원주 신림 쪽에서 관군을 막았다. 그의 이러한 활약은 호좌의진에서 가장 믿음직한 장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평가받았다.

1896년 4월 13일 호좌의진은 제천에서 장기렴이 이끈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뒤 전세가 크게 기울었다. 호좌의진은 그 대책으로 서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용사들을 규합하여 재기를 도모하고, 여의치 않으면 국경을 넘어 중국에 들어가 재기의 발판을 건설하려 하였다. 서북지역에서의 재기가 여의치 않자, 의진은 압록강을 건넜으나, 중국 관리들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는 중국으로 망명한 유인석을 따라 여러 차례 간도를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하여 박정수, 이종호와 함께 천진, 북경 등으로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후 그는 반년 남짓한 동안 만주를 전전하다가 황해도 평산에 머물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하다가 1897년 봄 귀국하였다.

◇ 을사의병으로 재봉기하다

정운경은 영춘에 은거하면서도 지역사회의 현안에 적극 관여하였다. 1903년 국가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경매하려 하자, 농민의 입장에 서서 부당한 관권에 대항하였다. 1904년에는 제천을 중심으로 일진회가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유인석의 지도에 따라 반외세적 성향의 향약을 실시하며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민중의 항일정신 고취하는데 전념하였다.

정운경이 쓴 친필 한시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나타났다. 호좌의진에서도 이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봉기하려 하였다. 당시 호좌의진의 전군장이었던 원용팔은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다가 주천에서 봉기하여 을미 의병 기간 호좌의진의 근거지인 제천을 비롯한 사군지역(제천·청풍·단양·영춘)과 영월·정선·평창·강릉·홍천 등의 관동 지역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원용팔의 부대는 일진회 회원을 처단하고 통신선을 끊으면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원용팔은 원주진위대의 배신으로 원주의 궁곡(현 원주시 지정면 판대리)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정운경은 의병을 재봉기하여 원용팔과 합세하려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의 소중화 예의의 나라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로지 주의의 눈물을 금할 수 었다."고 한탄하며 동지들과 장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창의를 외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서 군사를 모집하였다. 정운경은 각 면에 포수를 모집하도록 지시하고 종사와 포수들을 사방으로 보내 병력을 모으니 포군과 민군이 도합 300~400명에 이르렀다. 한편 그는 중앙과의 관계에 영향력이 있던 심상훈의 명성과 후광을 빌려보려고 장익환을 시켜 심상훈을 찾아가 그를 의병진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심상훈이 단양의 매포에 이르러 의진을 이탈하므로 그 계획도 실패하였다. 또한 그의 부대는 읍내로 진출하며 이강년에게도 사람을 보내서 호응을 청하였다. 그러나 10월 13일에 급히 출동한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병은 해산되고 그도 체포되어 영춘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 피체와 이후 활동

정운경의 문집

정운경은 압송된 후 미결수 상태에서 1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었다. 이듬해 9월 평리원에서 판결을 받을 때, 정운경은 "중화를 존숭하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은 춘추의 대의이며, 충성을 다하고 도적을 치는 것은 신민의 본분이라고 배웠는데 지금 원수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학하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재부와 판적을 노략질하며, 또한 관방과 복색을 변혁하게 하였으니 어찌 분통이 터져 원수를 몰아내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정당성을 밝혔다.

정운경은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에 있는 외딴섬인 철도(鐵島)로 귀양을 떠났다. 이때 황정일, 김하구 등 삼척에서 거의한 죄목으로 잡혀온 이들과 함께 황주까지 동행했다. 11월에는 홍주 의병의 지도자인 이세영이 황주 읍내로 귀양을 왔다. 정운경과 이세영은 미결수 시절에 이미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시로써 화답하던 사이로, 그들은 또 다시 의기투합하여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907년에는 을사늑약 이후 순절한 10명의 지사들의 위패를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며 우국충청의 마음을 달랬다.

정운경의 묘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정운경은 유배되어 있던 동안 견룡재(見龍齋)에서 학동을 가르치며 동료들과 서신을 통하여 교류하거나, 제천의 지인들이 다녀가는 편에는 동지들에게 편지를 전하여 의병 실패의 울분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는 1907년 11월, 고종의 은사령을 받아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으나 여비가 부족하여 황주에 머물다 1908년 2월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향 후 그는 선유사에게 주는 글을 쓴다거나, 남의 부탁을 받아 의병을 독려하는 격고문을 쓰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영춘에서 종중의 위토를 경작하기 위하여 제천 하소리로 옮겨 살다가 만년에는 고향인 월림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1939년 79세로 사망하였다.

이세영은 정운경의 행적을 적으면서 "선현의 업을 힘써 수행하고 덕과 미를 열심히 닦아 스스로 어리석음에 머물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의 삶을 칭송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장승순(문학박사, 충북대 사학과 한국근현대사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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