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신홍식

본래의 출생지는 '문의군 동면 대일리'인 듯
성경의 하나님 보고 방탕과 무절제 삶 청산
일경에 "독립운동 위해 평양서 왔다" 당당
2년 만기출옥후 사회계몽운동에도 적극적

  • 웹출고시간2015.03.22 17:26:55
  • 최종수정2015.03.22 17:26:55
신홍식(申洪植, 호는 東吾, 1872~1939)은 청주 출신 3·1운동 민족대표로서 약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부흥사 출신의 감리교 목회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위로과 희망을 전했으며, 사회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하고 방황하다

신홍식은 1872년 3월 1일 부친 신기우(申驥雨)와 모친 최살랍(崔撒拉, 구약성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한문음역)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 '홍식(弘植)'이라 불렀으나, 장년이 된 이후 '홍식(洪植)'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출생지는 가덕면 인차리로 알려져 있으나, 제적등본에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 25번지로 되어 있다. 그는 일제의 신문에 답하며 자신의 출생지를 문의군 동면 대일리(垈一里)로 진술한 바 있다.

지역의 유력한 고령 신씨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서얼 출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유년시절을 '칭찬시대'라고 자평할 만큼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대재(大才)'라는 소리를 들었다. 양반가에서 어려움 없이 자라던 그의 삶은 1886년 7월 20일 부친이 돌아가시면서 급변하였다. 편모슬하에서 가정형편이 어렵게 된 그는 과음을 하며 방황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 최씨는 아들을 불러 엄중하게 꾸짖었고, 정신을 차린 그는 인생의 살길을 과거에 두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적서차별이 엄격했던 신분제 사회에서 과거를 통해 성공을 꿈꿨던 그는 비리로 얼룩진 과거시험과 매관매직의 현실 앞에서 번번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였다.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마저 폐지되자,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장사를 시작한 그는 재산마저 모두 잃게 되었다. 이후 8~9년간 자신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실패자'로 치부했던 그의 삶은 술과 무절제한 생활이 이어졌다.

◇목회자로 다시 태어나다

자신에게 닥친 삶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신홍식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독교에는 교회의 힘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입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생교회로 설립된 '북감리회 청주읍교회'에 1904년부터 출석한 그는 성경을 읽던 중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신앙적 회개를 통해 방탕하고 이기적인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소망도 싹트기 시작하였다.

입교한 지 2년 만인 1906년 신홍식은 북감리회 서원보(W. C. Swearer) 선교사에게 발탁되어 세례를 받고 보은에 파송되면서,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후 1909년 직산, 1912년 입장과 목천, 1913년 직산 및 진천 등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감리교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한 그는 1913년 대표로 연설을 하며, 졸업(제2회)하였다. 이해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공주지방 순회목사로 활동하였고, 다음해 연기구역 내의 교회들을 담임하였다. 1915년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공주읍교회로 파송되었다.

아산 구미동교회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영적 체험을 경험한 그는 이후 신령한 부흥사로도 활약하였다. 1917년에는 일제에 저항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평양의 남산현교회로 파송되어 시무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기독교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다

신홍식은 2월 15일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한 이승훈(李昇薰)을 병문안하며 3·1운동에 대해 상의하고, 감리교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참여의사를 밝혔다. 2월 19일경 서울에서 YMCA 학생부 간사였던 박희도(朴熙道)를 만난 그는 국권회복을 위한 만세시위계획과 이승훈이 이미 평양에서 서울로 와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서울에 머물던 신홍식은 2월 20일 박희도, 21일 함태영과 함께 이갑성의 집에서 열린 세 차례의 준비 모임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는 주로 독립운동 방법과 천도교와의 합동 문제가 논의되었다. 세 번째 모임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동지를 모집하기로 하면서, 그는 평안남도(평양)를 맡기로 하였다.

주일 설교를 위해 2월 22일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며칠 후 안세환을 통해 천도교와 연합으로 독립운동이 추진된다는 것과 독립출원의 방법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부에 제출할 청원서의 날인에 필요한 인장을 이창주 전도사에게 주어 박희도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평안도에서 민족대표에 서명할 동지를 얻기 위해 신홍식은 이향리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홍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 등과 접촉하였다. 이들은 민족대표로서 서명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평양지역 감리교회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남산현교회 교인으로 숭의여학교 교사이면서 송죽결사대에 참여하고 있었던 박현숙에게 만세시위의 참가와 태극기 제작도 부탁하였다.

신홍식의 3.1운동 재판기록-신문조서

ⓒ 독립기념관
평양지역의 만세시위 준비를 마친 신홍식은 2월 28일 상경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한용운의 연설을 듣고 만세 삼창을 부른 후에 연행되었다.

신홍식은 조사과정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려고 평양에서 온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3월 14일 구속 기소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수차례의 재판에서 일제의 강제병합 반대와 독립에 대해서 '일제의 강점이후 나라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불평이 있었고, 기회가 있으면 조선사람의 조선으로 회복해야겠다', '일본 정부의 참혹한 비인도적 태도와 총독정치의 압박과 핍박이 시시각각으로 더 고통을 주어, 조선독립의 사상이 날로 더 가슴에 부글부글 끊게 되었다.' 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결국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1년 8개월간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21년 2월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고,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하였다.

◇금주·금연사상 담긴 동화 발표하기도

감옥에서 '영적 재판'을 받는 신비로운 체험을 경험한 신홍식은 출옥 이후 영혼과 민족혼을 깨우는 목회를 하면서, 절제운동·청년운동·농촌운동 등의 사회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890년대부터 개신교에서는 한국인들의 심각한 음주와 흡연이 가정적·사회적·국가적인 불행이 될 것이라고 여기고, 절제운동을 시작하였다. 방탕한 생활을 몸소 경험했던 그는 '죽어가는 민중을 살리고 파멸에 처한 사회를 개조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던 절제운동(금주·금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금주강연회 연사로 활동하던 그는 1927년 『기독신보』에 금주·금연사상이 담긴 『신통여행』이라는 동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기독신보』에 실린 '신통여행'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 연구

ⓒ 고성은
'청년이 우리의 미래'라는 인식을 가진 신홍식은 청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기독 청년들에게 함정에 빠진 민족과 혼돈에 빠진 종교를 위해 결단해야 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와 루터'와 같은 청년들이 일어나서 책임을 지고 용감하게 나가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청년운동을 감리교 청년공동체인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신홍식은 1920·30년대 농촌경제가 악화되고 농촌교회의 피폐 현상이 심해지자, 한국기독교계가 연합해 심혈을 기울였던 농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목회 초기부터 농촌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29년 감리사로 재직하던 원주에 농촌계몽 강연회를 개최하고, 기독교 농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야학이나 교육기관을 통해 농민들의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도 펼쳐 나갔다.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원주와 강릉에서 감리사로 시무하던 신홍식은 1935년 원주읍교회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원주에서 살던 그는 1937년 고향인 청주로 낙향하였고, 1년여 만에 가덕면 인차리 137번지로 이주하였다.

원주에서 찍은 가족사진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 연구

ⓒ 고성은
하지만 청주로 돌아온 삶은 편안하지 못하였다. 1925년 가입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고, 형사에게 지속적으로 감시를 당하였다. 또한 감리사 시절 급성 풍단병(신장 질환)으로 고생한 이후 계속해서 병환에 시달렸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일제의 감시와 병마로 고생하던 신홍식은 1939년 3월 18일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목회자였지만 그의 죽음은『조선감리회보』에 추모사 없이 간략한 부고로만 소식이 알려졌고, 장례도 조용하게 치러졌다. 문중의 신진호(85) 옹은 가덕중학교 인근 산자락 길옆에 조성되었던 그의 묘소가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산소로서는 부적합한 자리였다고 기억하였다. 이후 그의 묘소는 3·1운동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 8월 15일 지금의 가덕면사무소 건너편(인차후산)으로 이장되었고, 묘비도 세워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조성진 (독립기념관 연구원·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