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박기성(朴基成, 1905∼1991)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본 유학중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한 독립투사이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고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육군 장교로 준장까지 복무한 평생군인이었다. 예편 후에는 정치 등 다른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활동에 매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전념하였다.댕기머리 소년, 신학문에 눈뜨다그는 1905년 6월 1일 문백면 봉죽리(鳳竹里-석복, 갈마지)에서 박문용(朴汶容)과 연철희(延哲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 아명은 순성(順成), 호는 의당(毅堂)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이수현(李守玄)·오양준(歐陽軍)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진천에서 자라던 그는 어린시절 외가가 있는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행화정(杏花亭-울어바위)으로 이사하였다. 어려서는 부친께 천자문을 배우고, 15세까지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도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충북일보] 인조 9년(1631) 2월에 정한(鄭澣·?-1631)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지금의 충북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 등이 합천인 정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같은 옥천인 조흥빈(趙興賓)이 고변[밀고]하면서 일어났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도사를 보내 권대진·권계·권락·권순·정담·양천식·양정식·이찬희·정후엄, 박선검·박후검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잔존하던 대북파들이 자파 인물을 국왕으로 옹립, 세력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당색이 대북(大北)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천인 권대진은 '출신'(出身) 신분으로, 스스로를 중병영장 혹은 권천총(權千摠)으로 칭했다.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유생을 일컫는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575-1641)은 대북의 지지를 얻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 강화도로 유배된 끝에 제주도로 이배됐다. 당연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이끌던 대북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능(陵)·원(園)·묘(墓)를 구분했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 그리고 '원'은 세자·세자비·종실 무덤에 대한 호칭이다. 반면 묘 혹은 묘소는 일반 백성들의 무덤을 가리켰다. 신문 지상에 가끔 등장하는 총(塚)과 분(墳)은 문화재와 관련된 용어이다. '총'은 옛무덤 가운데 특이한 유물이 출토된 경우에 붙여지게 된다. 경주 금관총은 금관, 천마총은 천마도가 출토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분'은 특별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음 무덤으로, 지역명을 따서 'OO동 고분' 식으로 작명해 오고 있다. 가령 '경주 황성동 고분'과 같은 사례가 된다. 왕릉이나 사대부의 무덤과 달리 보통 사람의 무덤인 묘소는 대략 봉분(封墳), 입수도두(入首到頭), 용미(龍尾), 선익(蟬翼 혹은 사성), 계절(階節), 배계절(拜階節), 순전(脣前) 등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모두 풍수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로, 나름의 풍수내지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봉분(封墳) 풍수상 혈(穴)에 해당하고 있다. 봉분이 큰 함지박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주변과 묘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다. 일부에서는 자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나 분명치는 않다.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
[충북일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중세와 근현대 전시실이 나타난다. 기획전시실을 지나 앞마당에 이르면 고상창고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건물 주변에는 원형표시가 일정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원형표시가 이 일대에서 발굴한 고상창고건물을 표시한다. 이곳에서는 5세기 후반에 대형창고가 16채 이상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서일본의 대부분 지역의 물산과 한반도로부터 수입한 교역품은 나니와즈(難波津)에 집중되고 있었고 이곳에는 많은 저장시설(창고)이 줄지어 건립되고 있었다. 고상창고에서 육교를 건너면 나니와궁 유적이 드러난다. 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대동난을 거쳐 탄생한 일본 율령국가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한 '천황중심'의 세계관과 함께 천황과 그 관(官)이 대외관계를 독점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규슈 북부에는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고 이 곳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외교사절인 '번객(藩客)'과 스스로의 의지로 천황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귀화인(歸化人)'으로 분류하였다. '번객' 혹은 '귀화'는 '중화사상'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그러나 당의 율령과 일본의 율령에는 대외교역관리부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보이는데, 그 차이는 스스로 가진 고
[충북일보] 조선 영조-순조 연간을 산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영조 탕평책의 일종인 서얼통청운동에 의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제가·박지원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서얼청통(庶孼通淸)은 서얼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청요직(淸要職)은 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대중의 저서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청성'은 그의 호이다. 청성잡기에는 조서후기 심약이라는 인물과 기생 첨섬(翠蟾)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취섬은 함양 출신 기생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서울로 뽑혀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올 때 심약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소실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러자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곳까지 따라가 정성을 다해 심약을 섬겼다. 심약이 남해로
[충북일보]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기 전의 남한강은 한반도 내륙의 주요 물길이었고, 그 주변에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조선시대 뭇 시인과 묵객들은 남한강을 노래했고, 또 그림을 적잖이 남겼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남한강을 소강(遡江·거슬러 올라가기)과 하강(下江)을 하며 남긴 문화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종의 '스쳐가면서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숙종-영조 연간을 산 안중관(安重觀·1683-1752)이라는 인물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한강가인 충주목 가흥촌(可興村)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다수의 문학작품을 남겼고, 후손들이 이를 '회와집'(悔窩集)으로 편찬했다. 책은 8권으로 구성돼 있고 1904년에 발간됐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는 △가흥촌에 손수 세운 집의 이름 △현지 농민들과 어울리며 농부로 살아가는 모습 △청룡사 등 충주지역 사찰 방문 등의 이야기가 등장, 지역 친밀도를 높이고 있다.◇ 부친 때부터 가문 급격히 기울어 그는 본관이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안후(安土+后·1636-1710)는 노론계 인물로, 숙종의 신임을 받아 당상관인 우승지(정3품)까지 올랐으
[충북일보] 홍사구(洪思九, 1878~l896)는 1896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종사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1896년 4월 13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스승 안승우의 곁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평에서 스승 안승우를 만나다 홍사구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원구리에서 아버지 홍성유(洪聖裕)와 어머니 성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홍훈(洪·)은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8대조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이라고 한다. 영주에 살던 그는 집안이 빈한해지자 경기도 지평으로 이주하였다. 마침 옆집에 학문으로 유명한 안승우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안승우를 본 후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안승우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 일제에 맞서 일어난 제천의병 1894년 일제는 경복궁을 습격하
[충북일보] 7세기의 한반도의 정세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을 둘러싼 격동의 세기였고, 왜국도 또 그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640년대 제국은 모두 쿠테타나 정변에 의해 권력의 집중이 꾀해지고 있었다. 백제의 후예인 소가씨도 645년 나카노오에노미코(中大兄皇子)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 등에 의해 쫓겨났다. 나카노오에는 고토쿠(孝德)를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자가 되어 긴박한 한반도 정세를 배경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행하였다. 나카노오에는 수군을 주력으로 하여 바다를 건너갔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많은 백제의 유민과 함께 퇴각했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국제적 분쟁을 배경으로 중앙집권국가 건설을 모색했다. 이를 계기로 '천황'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였고 '왜'라는 칭호 대신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ㆍ이키ㆍ큐슈의 북부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667년에는 수도를 오미(近江) 지역의 오쯔(大津)으로 옮겼다. 다이카 개신이 있던 645년을 시점으로
[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의 입
[충북일보] 1755년(영조 31)에 발생한 춘천 교영계(敎英契) 역모사건의 명단에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유수원(柳壽垣)의 이름이 등장했다. 당연히 유수원은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반란·모역 등의 중대 범죄가 발생할 경우 왕의 명령에 의해 임시 심문기구인 국청(鞠廳)을 설치하고 죄를 캤다. 이때의 '鞠' 자는 '국문할 국' 자이다. 국문은 대개 2종류로 분류됐다. 임금이 친히 심문을 하면 친국(親鞫), 임금이 빠진 채 의금부·사헌부가 심문을 하면 정국(庭鞫)이라고 불렀다. 모반 등 국왕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은 주로 친국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의금부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의 관원, 좌 ·우포도청의 대장 등이 배석했고, 이 가운데 대신 한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명하여 시행하였다. 송강 정철도 정여립사건 때 위관을 맡았다가 두고 두고 영남사림(동인)의 원망을 산 바 있고, 실제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조는 내사복에서 유수원을 친국했다. 내사복은 본래 임금의 말과 수레를 전담 관리하던 관청이나 때때로 친국 장소로도 사용됐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광해군 연간을 산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역사지리서 《동국지리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주와 인연도 깊어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남일면에 시조 한란(韓蘭의 재당을 지었고, 그리고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를 상당구 운동동에 세우기도 했다. 그의 가까운 후손으로 한진호(韓鎭戶+木·1792-?)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31살 때인 순조 23년(1823)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가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혜교·이철유·정치순·정수교·정청풍·이후·성여 등 내외 친인척들이 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대부분도 과거에 낙방했고, 평소 자주 이용하던 남한강 물길을 귀향하고자 했다. 한진호는 이들의 귀향과 동행, 평소 하고 싶었던 단양팔경 여행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 남양주에 이르러서는 정약용 집도 방문 남한강 물길 여행에는 이들 외에 장인 정의준과 배에서 조수 노릇을 할 동자(童子) 양천돌도 동승했다. 따라서 한진호가 뚝섬에서 빌린 배에는 자신을 포함해 10명이 승선했다. 그는 1823년 4월 12일 한양 뚝섬을 출발해 9일만인 4월 21일 충주 목계에
[충북일보] 황학수(黃學秀, 1879~1953)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만주의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한평생을 무장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 될 때까지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로군정서, 신민부, 한국독립군 등 여러 단체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군인의 길로 들어서다 황학수는 1879년 서울 화동에서 부친 황두연(黃斗淵)과 모친 홍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으로는 이국현(李國賢)을 사용하였다. 그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어려서 성장한 제천을 고향으로 여겼다. 제천과의 연고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여생을 제천에서 보냈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모친 홍씨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와 다 시 상경할 때까지 10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1895년 부모를 여읜 황학수는 서울로 올라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합격하여 1900년 1월 제1기로 졸업하였다. 군인으로서의 첫걸음
[충북일보] 유수원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는 해인 1744년(영조 20) 벼슬길에서 물너났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노론이 득세하면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타의에 의해 야인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755년(영조 31) 5월 무렵이었다. 이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영조를 부정하는 글을 써내는 심정연(沈鼎衍·?-1755)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연루돼 처형된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이 그의 형들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심정연은 자라면서 형들의 얘기를 들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 교영계(敎英契)라는 춘천지역의 사당조직이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고, 당시 훈장은 유봉성(柳鳳星)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훈장은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
숙종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교의 도리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논쟁하는 사문(斯文)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소론은 창당정신을 저버리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노론도 마찬가지여서 승리한 자가 충(忠)이 되고, 패비한 자는 역(逆)이 되면서 공존의 정치는 사라지고 독존만이 횡행하였다. 숙종~경종 연간은 사화의 절정기였다. 1721년(경종1)에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왕세제가 탄생했다. 태종 이방원이 정종 때, 그리고 영조가 경종 때 세제로 책봉됐다. 노론은 나아가 병약하며서 후사가 없는 경종을 대신해 연잉군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다. 경종은 이를 수용했지만 조태구(趙泰耉·1660-1723), 유
[충북일보] 한강은 지리적으로 한강본류·남한강·북한강 등으로 구분되고 조선시대 뱃사공과 뗏사공들은 경기도 양수리를 기준으로 하류를 아랫강, 상류를 윗강으로 불렀다. 지류 가운데 규모가 큰 것에는 '江'(예 소양강·섬강·주천강), 이보다 작은 것에는 '川'자(예 충주 달천·장호원 청미천)를 붙였다. 江은 육로를 단절시키나 나루[渡津]는 육로 기능을 연결해 주고 있다. 때문에 나루의 사전적인 의미도 '강이나 내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으로, 그 기본적인 기능은 여객과 물자를 도하시키는데 있었다. 이 나루에 인마(人馬)와 물산의 유통 등 상업적인 기능이 더해지면 포구(浦口)로 발전하게 된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국의 나루는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57곳에 불과하던 것이 18세기 《여지도서》(1757)에 62곳, 19세기 《대동지지》(1865)에 이르러 100곳으로 늘어났다. 조선시대 남한강 수로에도 수십 개의 나루가 존재했고, 《세종실록》 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을 통해 충주목 나루에 대한 세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 덕흥창, 경원창과 일정 기간 공존전통시대 충주지역 남한강 일대의 나루와
[충북일보] 이형우(李亨雨 1889∼1958)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 이범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왕칭현(汪淸縣) 분단에 가입하여, 이듬 해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각지를 돌며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함경북도 영흥(현 금남군)에서 피체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북간도 왕칭현으로 망명하다 이형우의 본명은 이춘우(李春雨)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광복단 활동 당시 이형우, 이현(李玄), 이흥준(李興俊)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이나 본명을 숨기고 이명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동일인인지 알 수 없어 독립운동의 행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이형우 역시 법원 판결문의 기록 이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그가 만주의 광복단에 가입하여 그 조직의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무장독립투쟁을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
[충북일보] 충주목 출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이다. 조선의 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중심이었지만 구한말이 되면 그 명칭이 달라진다. 변천사를 살펴보면 1895년 '소학교', 1906년 '보통학교', 1941년 '국민학교' 등의 명칭이 등장했다. 일제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1941년 3월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칭은 반세기 넘게 사용되다가 1996년 3월 1일부터 지금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까지 생존했던 그가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구사했을리는 없다. 그는 '나이 4-5세', '15세 이전' 등 학령(學齡)의 개념을 구사했다. 그의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은 중국과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유수원은 중국의 교육관습 가운데 공부를 하다가 그쪽에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농(農)ㆍ상(商)ㆍ공(工)으로 전환하는 것을 무척 높이 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선비가 되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
[충북일보] 3세기 중엽이후 일관되게 나라분지의 야마도에 축조된 왜국왕묘(倭國王墓)가 4세기말엽 이후 오사카평야의 이즈미(和泉)의 모즈(百舌鳥)와 가와치(河內)의 후루이치(古市)에 축조되었다는 것은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후반에 걸쳐서 나라에 건설된 왜국의 왕묘가 4세기 말엽 오사카평야 남부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사기(古事記)』ㆍ『일본서기(日本書紀)』가 말하는 일본의 왕권이 '만세일계(萬世一系)'였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고분은 어디까지나 그 정치세력의 본거지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사카평야 남부에 대왕묘가 축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사카남부의 세력이 왕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모즈고분군의 닌토구(仁德)릉이 위치한 사카이시나 나니와(難波)는 나라의 야마토정권의 해외창구, 즉 주로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는 문화ㆍ정보유입의 창구였다. 왜왕은 하카타를 거쳐 사카이나 나니와를 출입하는 외교사절을 통해 국제정세의 정보를 독점하고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는 것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또한 주로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는 선진문물을 독점하여 그것을 나눠주는 것을 통해 그 권위를 획득하였다. 3세기 중엽이후 일관되게 나라분지의 야마
[충북일보] 한국의 자본주의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지금도 논쟁이 되고 있다. 일부 사학자는 구한말에 자본주의 맹아(싹)가 움트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내지 자본주의 내적 발전론이다. 반면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군은 일제가 자본주의를 이식했다고 보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러나 충주목 출신이면서 단양군수를 지낸 유수원의 《우서》(迂書) 일고나면, 적어도 구한말의 한반도에서 자본주의의 '새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유수원은 점포 자본주의라는 매우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점포를 육성·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이다. 그는 《우서》에서 '마판자(馬販子)와 배부상(背負商)들이 하루가 다하도록 분주히 다녀도 별로 팔지 못하고, 서울 입전(立廛)의 상인들이 눈이 빠지도록 손님을 기다려도 팔을 내젓고 지나가는 사람이 10이면 8~9나 되니, 이로써 보아 비록 공상(工商)을 성행시키고자 해도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우서 제1권)라고 자문했다. 인용문의 마판자는 말짐장수, 배부상은 등짐장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영세 규모로는 상업을 번창시킬 수 없다고 봤다. 나아가 그는 점사(점포)가 있어야
[충북일보]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내(苕川)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1801-1818년까지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충주 하담(荷潭)·목계·가흥,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 등이 등장하는, 남한강 물길을 소재로 한 한시를 많이 남겼다. 정약용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부모는 정지해(丁志諧·1712-1756)와 풍산홍씨이고 부모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과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尹小溫·1728-1770)이다.두 사람 사이에서 약전(丁若銓·1758-1816), 약종(丁若鍾·1760~1801), 약용 등의 형제가 태어났다. 다산은 풍산홍씨를 부인으로 맞아 6남 3녀를 낳았지만 그 가운데 2남 1녀만 얻었다. 다산의 조부모와 부모 묘는 모두 남한강 수계 부근인 충주목 가차산면(현 금가면) 하담진 근처에 위치했다. 하소나루라고도 불렸던 하담진은 금가면 하담과 건너편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를 연결했다. 다산은 시 (次長湖院·다산시문집 제1권)의 일부를 '내일은 하담 선영 성묘할 계획인데(來日荷潭謀O
[충북일보] 홍진(洪震, 1877~1946)은 대한제국의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3.1운동 시기 한성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에 기여했으며,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는 임시정부의 국무령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또 민족유일당운동과 전선통일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여 대일투쟁을 위한 민족역량의 결집에 공헌했다. ◇ 대한제국의 검사,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하다 홍진의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홍산으로 1877년 8월 27일(음력) 아버지 홍재식(洪在植)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삼형제 중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진의 출생지를 놓고는 충북 충주나 영동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는 홍진이 검사로서 최초 부임한 곳이 충주였다는 것, 또 그의 본적이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로서 홍진의 부모와 형제들이 그곳에 살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홍진은 27세 되던 1903년부터 법관양성소에서 약 1년 6개월간 수학한 뒤 법관양성소 박사와 한성재판소 및 평리원의 주사를 지냈다.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된 그는 그해 12월 충북 충주에 소재한 충청북도재판소에 부임했지만, 1년 6개월 만인
[충북일보] 광복 70주년, 한일수교 5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매주 충북대 사학과 임병덕 교수의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를 연재한다. 내용은 '가까운 아스카'(1-2주), '나니와 궁적, 오사카성'(3-4주), '우지(宇治) 뵤도인(平等院)'(5-6주), '도후쿠지와 후시미이나리진자'(7-8주), '아라야시마(嵐山)'(9-10주) 등이다. 일본속의 한국문화답사라는 표현에서 보듯 이번 시리즈는 일본문화의 뿌리가 상당수 한반도에서 시작됐거나 관련이 있음을 심층적으로 전할 예정이다. 임교수는 고대 중국 법률과 죽간 연구의 권위자로,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학단 전문위원도 겸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법류사상사』,『유골의 증언-고대중국의 형벌』, 『중국고대문명의 기원과 전개』, 『목간과 죽간으로 본 중국고대문화사』, 『동양사1』, 『구조율고』 등 다수가 있다. 오사카의 가와치(河內)에 위치한 '가까운 아스카'를 이야기하자면 이보다 앞서 성립한 야요이(彌生)시대와 야마타이국을 잠깐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일본열도는 기원전 3세기에 벼농사, 도기제작술, 관개기술 등이 한반도로부터 전래되어 농경생활이 시작되는데 이 시기가 야요이시대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일본의 청동기시
유수원이 언제부터 귓병을 앓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의 나일 30대 중반 무렵일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무신란(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본격적인 탕평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조는 소론의 경세가인 유수원을 경상도사, 태천(지금의 평북)현감 등에 잇따라 임명했다. 그러나 유수원은 귓병과 노모 숙환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청각 상실로 인한 실의를 《우서》 저술 등으로 극복했다. 《우서》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수원의 또 다른 저서로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이 있다. 관료 선발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은 1741년(영조 17)에 쓰여졌다. 특히 그 내용이 탕평책과 관련돼 있으면서 영조의 즉각적인 주목을 받았다. 영조는 유수원을 경연(經筵) 에 참석하게 했다. 경연은 임금이 신하와 더불어 유교 경전이나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제도를 일컫는다. 영조와 유수원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유수원은 청각을 완전히 잃은 상태로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임금이 말을 하면 배석한 신하가 한자로 써서 유수원에게 보이고, 유수원 역시 답변을 붓으로 한자를 써보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임금이 유수원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
[충북일보] 세광고등학교(교장 이정배) 야구부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에서 주관하는 '2024. 중부권 고교야구 주말리그(전반기)'에서 우승하며 대회 8년 연속 우승 신화를 써내려갔다. 세광고 야구부는 지난 3월 16일 충남의 강호 천안북일고를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10대 1로 승리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이어진 3월 17일 청주고, 23일 온양BC와의 경기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3승을 확보해 주말리그 우승을 달성할 수 있는 고지에 올라섰다. 3월 24일 공주고와의 경기에서 6대 4로 승리한 후 4월 27일 열린 천안CS에 6대 2로 5차전 경기까지 모두 승리하며 총 전적 5전 5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세광고는 이번 대회 우승과 더불어 '78회 황금사자기 전국야구대회', '79회 청룡기 전국야구대회' 등 전반기에 열리는 모든 전국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됐다. 오는 10월 11일부터 울산광역시에서 개최되는 '105회 전국체육대회'에는 충북도 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지난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52회 봉황대기 전국야구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전국 최고의 야구 명문 학교를 증명할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이정배 세광고 교
[충북일보]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까지 충북 청주시 소재 충북대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관한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렸다. 그러자 지역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이날 국가재정전략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기존에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국무총리와 장·차관 등 국무위원 중심으로 열렸다"며 "이번에는 다양한 민간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왜 굳이 충북대에서 이번 회의가 열렸어야 했는지 궁금증은 해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또 하나의 특징은 회의 장소가 충북대라는 점"이라며 "기존에는 주로 세종청사나 서울청사에서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었는데, 충북대를 이번에 택한 이유는 지방 발전, 지역 인재 육성을 포함한 지방시대와 연계해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열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이 또한 대통령의 의지라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일반 시민들의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MZ세대인 충북대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열어 청년일자리, 지역인재 육성 등의 고민과
[충북일보] 정부가 30일 글로벌 혁신특구 지정을 확정 발표하는 가운데 충북은 첨단재생의료 특구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다. 이 분야의 최종 후보 지역으로 선정된 청주 오송은 인프라가 잘 갖춰졌고 바이오 개발 전주기를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클러스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혁신특구는 규제를 최소화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적용된다. 오송이 유치에 성공하면 바이오와 첨단재생의료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데 탄력이 붙을 것으로 기대된다. 28일 충북도와 충북경제자유구역청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30일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열어 글로벌 혁신특구를 신규 지정할 예정이다. 앞서 중기부는 지난해 12월 충북(첨단재생바이오), 부산(차세대 해양모빌리티), 강원(AI 헬스케어), 전남(에너지 신산업) 4곳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규제·실증·인증·허가·보험 등 글로벌 기준에 맞는 제도가 적용되는 특구 지정을 결정해 5월 고시할 방침이다. 1차 관문을 무난히 통과한 충북은 최종 지정도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청지인 청주 오송은 연구개발 등의 기획 단계부터 실증, 사업화까지 원스톱 추진이 가능한 것이 최대 강점이다. 국내 바이오산업의 메
[충북일보] ◇올해 충북청주FC의 목표는. "지난해 리그는 목표였던 9위보다 한 단계 높은 8위로 마감했고 14경기 무패 기록도 세웠다. 그 배경에는 최윤겸 감독을 비롯한 코칭 스태프의 훌륭한 전략과 빈틈 없는 선수 관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스포츠 경영 리더십을 바탕으로 올해는 조금 더 높은 목표인 플레이오프를 향해 달려보려 한다. 13개 팀 중 5위 이상의 성적은 욕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달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매주 목요일 감독·코칭 스태프를 중심으로 선수 강화팀, 대외협력팀, 마케팅 홍보팀 등 사무국의 모든 팀이 모여 PPT 발표를 한다. 이 발표를 통해 지난 경기를 분석함과 동시에 다가오는 경기에 대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수립·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나아가야할 구단 운영 방향은. "단순하게 축구 경기 한 경기, 한 경기로만 끝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스포츠는 막강한 힘을 품고 있다. 스포츠 경기 활성화로 작게는 건전한 가족문화 형성부터 크게는 지역 소통, 나아가 지역 경제 성장까지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홈경기 날이 되면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는다. 경기 관람을 통해서 여가 시간에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