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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 그 물길 위의 인문학 - 정약용과 충주 하담

부모·부모묘 모두 남한강 옆의 충주 하담에 위치
묘관리하러 자주 물길 왕래…하담에서 유년시절도
유배가는 도중 하담선영에 들려 작별인사하고 오열
집안 정자 사휴정 있던 자리에 현재는 모현정 위치

  • 웹출고시간2015.08.31 15:11:12
  • 최종수정2015.08.31 14:19:33

정약용 초상화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어요

이 목숨 비록 부지한다 해도

큰 기대는 이미 틀렸습니다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쉴새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하늘 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렸더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돼버려

이 세상 사람들 거의가

아들 낳은 것 축하 않게 만들 줄을….


- 하담에서의 이별·다산시문집 제4권
[충북일보]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소내(苕川)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1801-1818년까지 18년 동안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충주 하담(荷潭)·목계·가흥, 강원도 원주, 경기도 여주 등이 등장하는, 남한강 물길을 소재로 한 한시를 많이 남겼다. 정약용의 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부모는 정지해(丁志諧·1712-1756)와 풍산홍씨이고 부모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과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尹小溫·1728-1770)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약전(丁若銓·1758-1816), 약종(丁若鍾·1760~1801), 약용 등의 형제가 태어났다. 다산은 풍산홍씨를 부인으로 맞아 6남 3녀를 낳았지만 그 가운데 2남 1녀만 얻었다.

모현정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모습으로 소형 배가 보인다. 일대가 하담진(하소나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의 조부모와 부모 묘는 모두 남한강 수계 부근인 충주목 가차산면(현 금가면) 하담진 근처에 위치했다. 하소나루라고도 불렸던 하담진은 금가면 하담과 건너편 가금면 장천리 저우내를 연결했다.

다산은 시 <장호원에 당도하여>(次長湖院·다산시문집 제1권)의 일부를 '내일은 하담 선영 성묘할 계획인데(來日荷潭謀O掃) / 서리맞은 묘역의 풀 어찌 차마 바라볼꼬(忍看原艸帶微霜)'라고 지었듯이 묘지 관리를 위해 고향 소내~충주 하담 2백여리의 남한강 물길을 자주 왕래했다.

다산은 부친 정재원이 그의 나이 서른살 때 진주목사로 근무하던 중 임지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하담에 묘지를 마련했고, 이후 소내의 고향집에 '망하루'(望荷樓)라는 정자를 짓고 아버지를 기렸다. '망하'는 '하담은 바라본다'는 뜻이다.

충주 하담 사휴산 정상의 모현정이다. 바로 아래는 남한강이다. 이 일대에 정약용 선영이 위치했다.

인용문 가운데 '같은 언덕'이 바로 사휴산으로, 지금은 홍이상 사당인 하강(荷江)서원과 풍산홍씨가 관리하는 모현정(慕賢亭)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401-5다. 사휴산에는 사휴정(四休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하담을 떠나며'라는 시에 이름이 등장한다.

'강 위 지은 누대 반 채뿐인데 / 하늘빛이 저 멀리 예주성(蘂州城) 을 가리키네 / 지으면서 흘린 눈물 발과 창에 배어 있고 / 부모 그린 그 정성은 꽃도 새도 다 안다오 / 도도(桃島)에 뜬 구름도 뜻이 있어 떴나보이 / 탄금대를 흐르는 물 슬퍼 소리 없다던가 / 서러워라 손수 심은 정원의 나무들은 / 봄이 오면 가지가지 잎이 다시 피련마는'
- 망하루를 읊은 백씨의 시에 받들어 화답하다·다산시문집 제3권>
'예주성'은 예성과 같은 말로 충주, '도도'는 하담 북쪽에 위치하던 작은 섬을 일컫고 있다. 이 시는 학자 정약용이 아닌, 효자 정약용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풍산홍씨와 함께 묘역 관리

충주 하담에 다산 선영이 어디에 위치했었는가는 수십년전 이장을 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산이 남긴 글을 보면, 충주 하담진 근처의 사휴산(四休山)에 위치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산은 출생지 남양주 소내와 선영이 있는 충주 하담을 남한강 물길을 통해 자주 왕래했다. 하담에서는 유년시절 일부도 보냈다.

다산은 <하담금송첩서>(荷潭禁松帖序)라는 산문의 일부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덤이 하담(荷潭)에 자리잡고 있고, 홍사문 성장 씨의 선영(先塋)도 같은 언덕에 있다. 때문에 두 집안이 그 묘역(墓域)을 수호함에 있어 반드시 성의를 모으고 힘을 어울기를 마치 형제처럼 하였다'(다산시문집 제13권)라고 적었다.

글 가운데 '홍사문 성장 씨'는 조선중기 충주의 유력 인물이었던 풍산홍씨 홍이상((洪履祥·1549-1615) 가문을 가리키고, '사문'은 선비라는 뜻이다. 이 글은 △두 집안의 묘가 같은 언덕에 있고 △따라서 형제처럼 함께 묘를 관리하고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사휴정 아래 물줄기 넘실넘실 흐르는데 / 객중의 말 슬피 울며 나룻배에 올랐네 / 가흥역에 당도하여 강어귀서 바라보니 / 장미산 푸른빛이 동녘 하늘 아련하네.'
- 다산시문집 제2권
사휴정은 본래 사휴산 정상에 위치했으나 다산이 전남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 자리에 지금의 모현정이 대신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연표 참조) 할머니와 아내가 풍산홍씨인 것에서 보듯 두 집안은 거의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인지 다산은 하담에서 죽마놀이를 하는 등 유년시절 일부도 보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하담에 이르러>(到荷潭·다산시문집 제1권)라는 시의 일부에서 하담을 '언제나 제집인 듯 사람 찾아와(人到每如家) / 지난날 죽마 타고 놀던 이곳에(竹馬他年戱)'라고 서술했다.

죽마놀이는 긴 작대기나 대나무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뛰어다니는 것으로, '죽마고우'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했다.

◇ 이승훈과는 처남매부, 황사영은 조카사위

1801년(순조 1)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등 1백여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박해로 형 약종(若鐘)이 처형됐고 또다른형 약전(若銓·1758-1816)은 신지도,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

다산 형제와 이승훈은 처남매부 사이였다. 형 약전과 다산이 그나마 처형되지 않고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그 직전에 가톨릭과의 관계를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장기로 유배를 가던 도중 하담의 선영에 들려 오열했다.

'아버지여 아시나이까 모르시나이까 / 어머님은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 가문이 금방 다 무너지고 / 죽느냐 사느냐 지금 이렇게 되었어요 / 이 목숨 비록 부지한다 해도 / 큰 기대는 이미 틀렸습니다 / 이 아들 낳고 부모님 기뻐하시고 / 쉴새없이 만지시고 기르셨지요 / 하늘 같은 그 은혜 꼭 갚으렸더니 /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리도 못돼버려 / 이 세상 사람들 거의가 / 아들 낳은 것 축하 않게 만들 줄을…'
- 하담에서의 이별·다산시문집 제4권
다산이 장기로 유배를 가있던 중 얼마되지 않아 이번에는 제천에서 이른바 황사영(黃嗣永) 백서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형 약전은 흑산도, 다산은 전남 강진으로 이배(유배지를 옮김)됐다. 두 사람에게 황사영은 조카사위였다.

두 형제는 전남 나주 율정(栗亭)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고, 이승에서는 더이상 만나지 못했다. 다산은 그 울분과 비통함을 '초가 주점 새벽 등불 깜박깜박 꺼지려 하는데 / 일어나서 샛별보니 아! 이제는 이별인가 / 두 눈만 말똥말똥 나도 그도 말이 없이 / 목청 억지로 바꾸려니 오열이 되고 마네 / 흑산도 머나먼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율정에서의 이별·다산시문집 제4권)라고 토로했다.

◇ 유배지 강진서 시집가는 딸에게 매조도

다산이 시집가는 외동딸에게 강진 유배지에서 그려 보낸 '매조도' 이다.

6남 3녀 가운데 하나만 얻은 외동딸이 어느덧 성장을 하여 윤창모라는 청년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딸의 혼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다산은 고이 간직했던 치마 한 폭을 잘라 매화꽃 가지에 다정하게 붙어서 앉아 있는 참새 한쌍을 그렸다. 매조도(梅鳥圖)로 불리는 그림이다.

그림은 다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매실처럼 주렁주렁 아들딸 많이 낳아 잘 살라는 유배지에서의 아비 바람을 담았다. 그리고 그림 밑에는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네 /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 만발한 꽃이라 그 열매도 달단다'(매조도 시문)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림 밑의 산문에는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치마폭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사연이 적혀 있다. 부인이 보낸 치마폭이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 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매조도 산문>

1818년 다산은 해배(解配)를 통보받고 18년만에 고향 소내 마을로 돌아왔다. 노론들의 집요한 반대로 유배기간이 훨씬 길어졌고, 그 사이에 형 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 작고했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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