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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수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외솔회 회장

이 시대에 거의 한 세기를 살아온 한 분의 스승이 계시다. 그 분은 1916년생으로 올해 95세가 되신다. 그 분은 이름만 대면 많은 사람들이 알 만한 학자로서, 일제 강점 시대 만주의 용정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치고, 대학은 경성에 와서 다니셨다. 알려진 이야기로는 그 대학에 다니실 때에 수재로 인정되어 모교를 빛낼 인물로 촉망을 받았고, 설립자인 외국인집에서 숙식을 하며, 영어를 배워 아주 능숙하게 구사하게 되셨다고 한다. 실제로 선생님은 모국어인 한국어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등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시다.

그 분은 광복 직후에 용정에서 하시던 중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으시고, 조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청의 문교부에 편수사로 가셔서, 대한민국 초기의 국민학교용 국어교과서를 만드는 데 일조를 하셨다. 그 유명한 '바둑이와 철수'와 같은 글이 국민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도 그 분이 주도하신 것이다.

1950년대는 우리나라 국어학계도 크게 변하는 시기였다. 즉 주시경 선생님 이후 전통문법의 맥을 이어오던 국어 문법 학계에 1930년대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구조주의 언어학'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에 관한 중요한 책을 번역하여 소개하고, 스스로 한국어의 구조에 대하여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 이도 그 분이셨다. 또한 그 분이 재직하시던 대학에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하여,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 외교관, 학자, 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게 하셨으며, 한국인들에게는 외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학당을 같은 기관에 병설하셨다. 지금도 그 학당은 엄청난 수의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수입도 아주 많이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분이 사셨던 기간은 나라와 민족이 유례없는 수난을 겪은 시기로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조상이 이민 간 용정에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은 일본에 빼앗긴 조국에서 마쳤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지만, 이승만 정권 후 4. 19, 5. 16, 유신시대로 이어지는 격변 속에서 독재정권의 횡포와 소속한 대학의 분규는 그 분에게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그 분은 1976년, 정권의 유지책으로 새로 만든 제도인 제1차 교수 재임용에서 그 대학의 다른 네 교수와 함께 쫓겨나,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을 가셨다. 재임용 탈락의 이유를 미국에서 상주하는 정보요원한테서 들으니, 운동권 학생들을 도와준 것이 빌미가 되었더라고 나중에 말씀하셨다. 그 곳에서도 그 분은 독재정권을 비난하는 등 반한운동을 하셨다. 그 탓에 12년 후에야 국가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실 수 있었다.

귀국하신 후 그 분은 10여 년 간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다. 그 분은 연로하심에도 손수 차를 몰고 다니시며, 세 시간을 연강으로 하실 만큼 건강하셨다. 내용은 국내와 세계의 언어학 전반에 관한 정세는 물론, 국어학 · 국문학을 비롯한 국학에 관한 역사와 이론 등으로 젊은 세대들은 전혀 알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것이 많았기 때문에 아주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구태의연한 문구의 성경을 새로운 국어로 번역하는 한편, 40년 전부터 구상하고 계시던 '현대 한국어 통어론 연구'에 전념하여, 90세가 넘은 연세에 탈고, 출판하였는데 국판으로 1,400쪽이 넘었다.

그 분을 50여 년 간 괴롭힌 일은 스승과의 불편한 관계였다. 원래는 유명한 스승의 사랑받던 수제자였으나, 1963년에 문교부에서 시행한 '학교 문법 통일' 결정과정에서 생긴 오해 때문이었다. 당시 학교문법에서는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의 용어를 쓰는 문법 교과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것을 이른바 '전문 위원회'에서 표결한 결과 7:8로 문장론의 술어는 한자어를 쓰기로 결정이 난 것이었다. 그 후 고유어 계열의 학계에서는 그 분이 스승을 따르지 않고, 한자어 쪽을 지지한 것으로 오인한 까닭에, 많은 비난을 받고, 처신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 분은 늦게야 그런 오해를 받은 사실에 경악하였고, 50여 년이나 간직하셨던, 당시 회의에 부쳤던 자료와 당신이 일지 형식으로 쓰신 공책과 결정 이후 나온 신문 기사 등을 제자에게 주셨으며, 그 제자는 면밀히 그것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그 회의의 기록을 담당하였던 공무원 출신 원로 한 분으로부터 그 자료를 입증할 만한 중언도 들었다. 그 결과 그 분은 절대로 스승을 배반한 적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지금 그 분은 연로하신 몸으로 노인 요양소에서 간신히 삶을 영위하고 계신다. 그래도 가끔 제자들에게 전화를 하셔서 안부를 묻곤 하신다. 많은 제자들이 그 분의 가르침을 받고 아낌을 받았건만, 자주 찾아가는 이는 드물다. 이것이 한 세기 가까이 국어학과 후진들의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큰 학자이자, 많은 이들의 스승인 어떤 분의 이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원로를 대하는 참모습이나 아닌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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