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상재하면서 그녀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긍정의 세계로 진입한다. 한(恨) 맺힌 비극의 생을 통과하여 역설적 긍정의 삶에 도달한다. 삶이 가져다준 분노와 절망, 회한과 슬픔, 우울과 공포, 무수한 고통의 감정들을 뼛속 깊이 발효시켜 시를 낳는데, 물이 중요 소재로 사용된다. 물의 순환을 통해 삶의 생장과 소멸, 비움과 재생의 순환성을 그린다. 그녀에게 삶은 물방울 같이 환하고 둥근 수궁(水宮) 세계, 물속의 환한 화엄 세계로 그려진다. 왜 삶에 대한 시선이 바뀐 걸까·
물은 흔히 재생, 정화, 속죄, 생명 등의 상징으로 쓰인다. 어두운 물이 오욕과 고통의 삶을 상징한다면, 밝은 물은 정화된 긍정적 삶을 표상한다. 시인이 목마른 삶의 어둠 속에서 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 자각이 환한 물 이미지로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물의 형상이 삼각이나 사각처럼 각지지 않고 둥근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세상을 둥글게 품어 안으려는 무의식의 반영이며,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의 표출일 것이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천양희의 시는 한결 품이 넓어진다. 상실과 고통의 세계에서 희망과 화해의 세계로 이주한다. 대극적 요소들이 하나로 일체화하는 불교적 불이(不二)의식, 모성지향 의식이 시의 저변에 자리 잡는다. 모성애에 대한 추구는 삶의 고통을 품어 안으려는 대지의 대승적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인 스스로 죽음을 근사체험 함으로써 삶의 바닥에서 슬픔과 고통을 몸으로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중기 이후의 시는 혹독함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이 동시성 때문에 삶의 잿빛 허무와 고독이 시 저변에 짙게 깔리면서도 그 비극의 문양과 색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된 농담 - 천양희([千良姬 1942~ )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 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 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