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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03.22 18:18:06
  • 최종수정2018.06.07 10:28:18
[충북일보] 천양희의 초기 시는 삶의 벼랑에서 마주했던 뼈아픈 시간들에 대한 아픈 기록이다. 당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암매장된 생'으로 표현한다. 이는 고통과 절망이 봄꽃처럼 피어나는 암울한 미로 세계에서의 길 찾기 또는 빛 찾기가 곧 그녀의 시작(詩作)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그녀의 초기 시에는 고독과 허무, 나르시시즘, 소외된 자아를 응시하는 자기애가 자주 나타난다. 자기애는 외부의 대상물을 향하던 사랑이나 기대가 무참히 짓밟히거나 거부될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는 방어기제다. 자아는 외부세계와 차단막을 치는 비사회적 태도를 취하는데, 그녀의 초기 시에 자아의 처절한 유폐와 절망적 소외감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방어심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상재하면서 그녀는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긍정의 세계로 진입한다. 한(恨) 맺힌 비극의 생을 통과하여 역설적 긍정의 삶에 도달한다. 삶이 가져다준 분노와 절망, 회한과 슬픔, 우울과 공포, 무수한 고통의 감정들을 뼛속 깊이 발효시켜 시를 낳는데, 물이 중요 소재로 사용된다. 물의 순환을 통해 삶의 생장과 소멸, 비움과 재생의 순환성을 그린다. 그녀에게 삶은 물방울 같이 환하고 둥근 수궁(水宮) 세계, 물속의 환한 화엄 세계로 그려진다. 왜 삶에 대한 시선이 바뀐 걸까·

물은 흔히 재생, 정화, 속죄, 생명 등의 상징으로 쓰인다. 어두운 물이 오욕과 고통의 삶을 상징한다면, 밝은 물은 정화된 긍정적 삶을 표상한다. 시인이 목마른 삶의 어둠 속에서 물의 소중함과 가치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 자각이 환한 물 이미지로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물의 형상이 삼각이나 사각처럼 각지지 않고 둥근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는 세상을 둥글게 품어 안으려는 무의식의 반영이며, 자신의 삶 또한 그렇게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의 표출일 것이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천양희의 시는 한결 품이 넓어진다. 상실과 고통의 세계에서 희망과 화해의 세계로 이주한다. 대극적 요소들이 하나로 일체화하는 불교적 불이(不二)의식, 모성지향 의식이 시의 저변에 자리 잡는다. 모성애에 대한 추구는 삶의 고통을 품어 안으려는 대지의 대승적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인 스스로 죽음을 근사체험 함으로써 삶의 바닥에서 슬픔과 고통을 몸으로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중기 이후의 시는 혹독함과 아름다움, 어둠과 빛이 공존한다. 이 동시성 때문에 삶의 잿빛 허무와 고독이 시 저변에 짙게 깔리면서도 그 비극의 문양과 색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된 농담 - 천양희([千良姬 1942~ )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 밤을 기억해 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더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 오르다 늙은 남편이

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 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 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열매보다 몇 알이나 더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은 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려 보였다

농담이 나무 그늘보다 더더 깊고 서늘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녀는 시를 쓰는 자신을 성찰하고 작은 생명들에게서도 눈부신 빛을 발견한다. 수행자처럼 뾰족한 마음을 깎아내어 새와 바람, 병과 강물, 아이들의 세계를 맑고 유순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물들이 상호 넘나들며 상생하고 호흡하는 자연의 보편적 세계, 아름다운 농담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런 고백의 시선과 애틋한 마음 때문에 시어들은 진솔한 공감을 낳고 고목의 뿌리처럼 묵직한 울림을 준다.

'오래된 농담'은 시인의 이런 맑고 순수한 사랑을 애잔하게 보여주는 시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아름답고 아픈 풍경화다.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을 헌신과 배려, 이타적 사랑이 느껴진다. 서로 대비되는 다른 것들의 대승적 수용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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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