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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필과 함께하는 가을동화 - 모래 여자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 웹출고시간2018.10.18 17:03:01
  • 최종수정2018.10.18 17:03:01
[충북일보] 김혜순은 관념적 진술이나 재현이 아니라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낯선 풍경과 초현실적 이미지들을 탄생시킨다. 언어의 방법적 뒤틈을 통해 외부세계 또한 극도로 뒤틀려 있음을 자각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 자체보다 대상의 왜곡이 환기시키는 대상의 죽음, 대상의 죽음이 환기시키는 미적 파장과 충격이 중요해진다. 대상은 곧 대상의 죽음이며 이때의 죽음은 대상의 생물학적 죽음이나 현상적 죽음이 아니라 세계의 폐부 깊은 곳에 자리한 선험적 죽음이다.

김혜순 시는 들끓는 이미지의 연쇄, 합리적 사고의 위반과 역배치, 이질적 공간의 혼합, 젊고 경쾌한 감각과 리듬, 낯선 상상력과 회화적 기법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특히 주목되는 건 시적 자아의 끝없는 유동성(流動性)이다. 어떤 시에서는 물결처럼 음악처럼 세계로 우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확장력을 보이고, 어떤 시에서는 단 한 사람의 몸으로 수렴되는 미시적 응집력을 보인다. 이는 시인이 자아와 타자, 자아와 대상, 자아와 세계 사이에 국경을 세우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그녀에게 시 쓰기는 몸을 통한 세계 전체의 잉태와 출산인 셈이다. 그녀의 시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 여성의 몸과 여성성에 대한 근원적 자각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통을 겪는 여성의 몸이 자주 나타나는데 대부분 남성에 의해 식민화된 몸, 해탈과 열반이 불가능한 몸, 출산을 무수히 반복하는 피투성이 몸으로 그려진다.

「모래 여자」에도 모래 속에서 발굴되어 전시용 미라가 되는 여자의 몸이 등장한다. 여자가 모래에서 발굴되는 장면, 슬픈 서사, 여자를 미라로 만들어 전시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백지에 옮기며 고통을 겪는 시인이 등장한다. 전장에 나가 죽은 남자를 영원히 기다리는 여자의 몸은 죽었으나 영원히 죽지 않는 신화적 불멸 이미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자의 옷을 벗기고 가슴을 열어 미라로 만든 후 유리관에 뉘여 전시한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여자의 몸의 훼손과 미라 제작 및 전시 행위가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남성적 폭력과 상품자본화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소비상품으로 물화된 여성의 몸을 둘러싼 남성 권력과 지배이데올로기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의 기원과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흥미로운 건 모래에서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는 주체가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두 손을 보면서 시인은 백지사막으로부터 낙타를 타고 벗어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다. 모래 여자가 꿈속까지 따라올 정도니 이 여자의 실체는 시인의 몸에 원초적으로 잠재된 무의식적 자아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모래 여자와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여성의 존재와 기원을 생각하고, 시간과 무에 대해 사색하면서 슬픔에 빠져들고 있다. 모래 여자의 숨과 악몽을 자신의 숨과 악몽으로 치환하면서 시인은 점점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은 슬픔에 빠져든다.

/ 함기석 시인

모래 여자 - 김혜순(金惠順 1955∼ )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 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 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감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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