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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9.04.04 17:47:40
  • 최종수정2019.04.04 17:54:04
길섶 모퉁이에 봄 까치꽃 꽃다지 꽃 마리, 양지꽃이 귀엽고도 예쁘게 피어있다. 다소곳하니 낮게 핀 풀꽃에게서 어릴 적 봄의 숨결이 스며든다. 양지바른 들녘을 헤매며 동무들과 나물을 캐던 유년의 풍경이 저만치서 아지랑이 되어 피어오른다. 얼어붙은 땅을 뚫고 돋아난 냉이 벌금자리 쑥을 뜯노라면 하늘을 나는 종달새는 높은음자리로 노래를 불렀다.

남녘으로부터 날아드는 꽃소식에 두 손을 모아 귓가에 대고 그 시절 낯익은 봄의 소리를 기다린다. 보리밭 사이로 파릇하게 불어오던 봄바람소리, 버들가지 비틀어 피리를 불던 개울가 호드기 소리, 대문 옆 텃밭에 마늘 순 내미는 소리, 봄 햇살 쪼이는 노랑 병아리소리, 참꽃 핀 산자락에 아버지가 읊던 시조가락까지….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고향의 소리가 문득 그리워진다.

호롱불아래 밤마다 어머니와 이야기책을 읽던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는 비록 가난한 농부였으나 자식들에게는 남다른 긍지를 심어주었다. 유쾌한 성품의 소유자이셨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따듯하고도 우렁찼다.

고달픈 인생을 노래로 달래시던 아버지는 이른 봄 진달래꽃이 필 때면 어린 내 손을 잡고 마을 앞산에 오르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엇더리.' 황진이의 시조다. 삼태기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산자락에 청청한 아버지의 시조가락이 메아리친다. 꽃잎이 얇고 보드라운 참꽃을 따 먹으며 나는 아버지의 가락을 흥얼거린다. 연분홍 꽃물이 봄 산을 수 놓아가듯 내 마음도 아버지의 노래로 물들어갔다.

"청 사안 리 히이이-, 벽개수야하아아."

음표도 없는 노래는 끝마디에 흐르는 절묘한 가락이 한바탕 영혼을 울리며 긴 여운을 남긴다.

아무런 뜻도 모르면서 그럴싸하게 아버지의 운율을 흉내 내던 어릴 적 내 모습에 그만 웃음이 난다. 이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한 소절 또 한 소절 몸에 배어있는 시조가락은 언제나 봄이 오는 길목에 제일 먼저 찾아든다. 돌아보면 심연에 남겨진 아버지의 노래는 초등학교시절엔 흥겨움으로 다가왔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한을 토해내듯 서글프고 애절한 절규로 들렸다.

1910년생이신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오대독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을 겪으며 암울하고 빈곤하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살아내셨다. 육남매를 키우며 옹색했던 살림에 고단하고 힘겨울 때 부르던 노래는 느린 장단으로 마디를 넘었고 즐거운 날엔 고개를 끄덕이며 불렀을 아버지의 장단은 어쩌면 설움을 딛고 삶의 애환을 풍류로 승화시킨 기도가 아니겠는가?

가진 것 없고 아는 것 없어도 일생을 해학으로 살다 가신 아버지의 생애는, 아름다운 유산이 되어 나를 문학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머니와 진달래 화전으로 안주를 삼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조를 읊던 비 오는 날의 초상...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다." 낙숫물소리와 함께 처마 끝으로 흐르던 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슴에 저며 온다.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플롯을 꺼냈다. 너무 오래 버려두어 구릿빛 녹이 슬어 있다. 옛 시절 봄날의 아버지가 사유하시던 낭만을 그리며 마음을 어루만지듯 보드라운 천으로 묵은 때를 닦는다. 은빛물결이 다시 살아나 플롯 색이 선명하다.

투, 투, 투, 투. 입술을 모아 마우스 피스 홀에 대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맑은 소리가 났다. 열손가락을 살며시 본관과 하관에 얹고 텅잉을 반복해 본다. 잃었던 음감과 오선지에 그려진 악보가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청아하고 은은한 플룻 소리는 산을 넘고 세월을 건너 먼 기억 속에 아버지가 부르던 노랫가락과 협연을 시작 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가 되어 어깨 위에서 춤을 춘다. 진달래꽃이 필 때면 봄날의 왈츠를….

박영희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수료

효동문학상 작품공모 대상

푸른솔문인협회 회원

에덴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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